[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1

이병길 2021. 4. 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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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과 미국의원단 사건

[이병길 기자]

박재혁, 투탄 의거를 결심하다

상해의 김원봉이 박재혁에게 여비 100엔을 송금하였다. 발송인은 상해의 김병태이고 수취인은 부산의 김영주였다. 김영주로부터 위장 송금한 여비 100엔을 받아서 1920년 8월 6일 상해로 박재혁은 건너갔다. 김병태는 파리에 갔던 김인태의 동생이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김원봉과 같이 의열 활동을 하고 있었다.

8월 7일 박재혁은 관부연락선으로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문사(門司, 북규슈)에 건너가 복강(福岡, 후쿠오카)으로 가서 수시정(須崎町, 스사키마치)에서 이틀 밤을 자고 규슈대학(九州大学) 병원에 출입하였다. 다시 문사로 가사 조선사람 몇과 어울리다가 중국 상해로 갔다. 박재혁이 병원을 출입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사망 원인이 폐병이라는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어떤 질병 때문에 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후로 8월 상순 세 번이나 부산에서 상해로 가서 김성일(김원봉)과 두 번 만나 부산경찰서장을 살해하고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자고 부탁하자, 박재혁은 응낙하고 실행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8월에 긴박하게 부산과 일본, 중국을 자주 넘나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싱가포르로 돌아가 있던 박재혁에게 김원봉은 전보를 쳐서 상해로 돌아오도록 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모임에는 응해야 하는 의열단의 공약을 아는 박재혁은 김원봉의 호출에 즉각 응했다. 박재혁이 전했던 의열단 1차 의거 실패에 대해 김원봉은 슬픔과 노여움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유능한 동지들이 왜경에 검거당한 것에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간 수개월에 걸쳐 동지들은 모든 곤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작탄투쟁의 성공을 위해 준비하고 계획하였었다. 거사를 위한 폭탄을 1, 2차로 나누어 수송하고 동지를 경성과 밀양 등지로 분산 배치하는 등 나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매서운 감시망에 걸려 동지들이 검거되었다. 많은 동지가 이미 희생되었다.

김원봉은 1차 의거가 실패한 원인을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무기를 국내가 아닌 국외에서 수송하는 문제였다.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출입이 단신으로도 쉽지 않은데 탄약과 무기까지 비밀리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는 또한 경비 문제가 발생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생산적 활동을 통한 자금의 확보가 아닌 국내외의 양심적 인사들에 의한 지원이기에 늘 부족했다. 특히 작탄투쟁은 비밀 중의 비밀로 엄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극도의 보안을 요구하기에 자금은 더 많이 필요했다. 결국 무기 수송의 곤란과 자금의 부족이 조선에서의 투쟁은 어려웠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민족해방투쟁에서 국내 투쟁의 장애였다. 중국보다 식민지 조선은 일경의 감시를 쉽게 뚫지 못하는 어려움이 더 있었다.

의열단의 투쟁은 난관 중의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의열단의 1차 국내 의거가 내부 밀정에 의해 실패한 점도 있지만, 실상은 내부보다 외부적 요인이 더 큰 원인이었다. 이제는 다수가 아닌 소수가 움직여 적의 감시망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대대적인 검거 이후이기에, 또 미국의원단이 떠난 뒤라 잠시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노려야 했다.

“박형, 이제 거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김 단장, 그동안 마음고생을 시켜 미안하오. 동지들이 잡힌 소식을 듣고 고문에 온갖 악형과 갖은 고초를 겪을 것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소.”
“적의 감시망을 뚫을 유일한 방법은 단신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박재혁은 잠시 망설였다. 혼자 움직이는 것이 긍정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거사 성공이 쉽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작탄 투쟁은 다수가 움직여 성공한 적이 많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단신 투쟁이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비 기간과 경비가 문제였다.

“박형, 동지들이 많이 잡혀간 곳이 부산경찰서입니다. 박형의 고향이 부산이니 지리를 잘 알고, 또 박형을 도와줄 구세단 동지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산경찰서를 폭파해 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겠소. 마음 같아서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싶지만 ….”

부산경찰서는 밀양폭탄사건과 진영사건으로 붙잡힌 동지들이 조사를 받는 곳이었다. 박재혁의 입장에서는 경성이나 평양과 같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한 지역보다는 익숙한 고향 부산이 거사 장소로서는 가장 좋다고 여겼다. 부산경찰서는 이미 구세단 사건으로 간 적이 있기에 익숙한 장소였다. 당시 부산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현관이었으며, 대륙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런데다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개발된 부산은 제2의 오사카로 불렸다. 또한 의열투쟁의 경우 대상지역에 대한 이해와 타격대상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 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박재혁이 가장 잘 아는 부산경찰서를 대상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박형, 부산경찰서에 투탄할 때 그냥 건물만 폭파할 것이 아니라 인명 살상이 요구됩니다.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누구의 손에 무슨 까닭으로 인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알도록 단단히 죄를 묻고 난 다음에 죽였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인명 살상까지를 김원봉은 요구했다. 그만큼 1차 의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부산경찰서에 들어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그때 불현듯 구세단 사건 당시 잡혀갔을 때 부산경찰서장이 중국 고서 수집광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떠올랐다.

“김 단장,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하고 잠입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박형, 참 좋은 생각입니다. 중국 고서는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박형은 부산으로 갈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박재혁은 부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김원봉이 준 중국 고서를 챙겼다. 물론 자신이 구한 고서도 몇 권 챙겼다. 박재혁은 일찍이 총독정치에 불만을 품고 한국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관공서를 파괴, 직원을 살상시켜 민심을 동요시키기는 계획을 추진했던 의열단원으로 투탄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박재혁은 8월 31일 러시아식 1902년식 폭탄을 김원봉으로부터 받았다. 폭탄은 지름 약 2촌(寸), 높이 약 4촌의 주철(鑄鐵)로 만든 원통형 폭탄 1개였다. 김원봉(김성일)으로부터 폭탄 1개와 300엔 외에 여비 50엔을 받았다. 일제 고관의 암살 및 중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한 의열단의 제1차 의거 실패 이후 일본 경찰에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의열단원 박재혁에게 폭탄이 쥐어졌다.

하지만 박재혁이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것은 몇 달이 되지 않았다. 박재혁은 투탄 실행단이라보다는 군자금 모금단에 가까운 행적을 가진 인물이다. 박재혁은 준비되지 않은 의열단원이었다. 어쩌면 제1차 의열단의 국내기관 총공격의 실패 때문에 급하게 부산경찰서 투탄 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당시 의열단원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다. 의욕은 높았지만, 체계적인 교육이나 훈련이 없었다. 무기나 폭탄이 충분하지 않아 연습 자체가 쉽지 않았다. 폭탄이 불발탄인 경우도 많았다. 미국의원단이 들어오기 전 평양 투탄 의거에서도 평양부청과 평양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민족해방투쟁에서 성공과 실패는 인간의 일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일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희망의 길을 걷는 존재가 인간이다.

박재혁, 일본에서 미국의원단에 투탄하려 하다

미국의원단에 대한 한국인들은 대단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1920년 8월에 작성한 대한전국인민대표(大韓全國人民代表) 선언서에는 “세계 인류의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 비참한 우리의 악전고투를 위하여 장래에 더욱 공의(公義)로운 이해와 원조를 주어 써 이천만 가련한 동포로 하여금 여러분의 동포와 같은 자유와 복락을 누리게 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 대한각여자계대표(大韓各女子界 代表)는 “작년 3월 1일 이래로 우리의 수만의 아버지들과 남편들과 형제들과 자녀들은 저 무도한 정복자의 총과 창, 소방대의 철구(鐵鉤, 쇠갈고리)와 상민(商民)의 몽둥이와 악형에 피를 흘리고 수모를 당하고 옥중의 고초를 당하”고 있다며 한국 민족 독립을 원조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일제는 미국의원단의 방한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어떻게든지 외교 문제를 일으켜 미일전쟁이 일어나게 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일”이라고 보았다.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미국의원단 방한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투쟁은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려 함과 아울러 일본 통치의 참상을 알려 조선 독립을 위한 강대국의 여론 지지를 얻고자 함이었다. 또 정의와 자유를 상징하는 미국의 힘을 통해 독립을 얻고자 함이었다. 1920년에 “조선인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고립상태에 있으므로 미국에 의존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의 친일적 극동 정책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제휴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보호 통치의 합법성을 인정한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한국인들은 몰랐었다. 세계 여론 역시 일본의 조선 통치를 필연이며 지당하다고 보고 있었다.
 
▲ 미국의원 스몰과 그의 편지 미국의원단은 “조선인이 원하는 독립문제는 조선과 일본에서 논의하기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실력 양성을 권고하였다. 독립은 조선인의 일이지 미국의 일이 아니었다. 출처 : 매일신보(1920.08.26.)
ⓒ 매일신보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함을 기회 삼아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하여 경성에서 대소동을 일으키려 하였던 “육혈포암살단”과 “만주광복단군영결사단”은 사전에 적발되어 검거되었다. 암살 사건이나 투탄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만세 시위는 많이 있었다. 김원봉과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조선이 아닌 일본 동경에서 큰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고 신숙(申肅, 1885~1967)은 생각했다. 신숙은 천도교인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는 데 참여하고 각 지방에 배포하여 서대문형무소에 3개월 동안 갇힌 후 석방된 적이 있다. 1920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천도교 대표로 연락 임무를 띠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악형과 고문으로 수개월을 보낸 뒤 석방되었다. 상해에 망명하여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활동하다가 천도교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그는 일본에서는 미국의원단을 맞이한 이제까지의 방식과 다른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에서의 투쟁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원단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와 투탄과 암살을 시도한 것과는 달라야 한다. 분명히 투탄 투쟁을 해야 하지만 그 대상은 조선처럼 총독부 관료가 아니라 일본에서는 미국의원단이어야 한다. 당시 임시정부는 부정하였던 것으로 미일전쟁을 발발시키기 위하여 의원단 암살을 계획한 것이다. 암살의 주동자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어야 했다. 일본인에 의한 미국의원단을 향한 투탄이 되어야 했다. 목적은 일본을 고립시키고,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당시에 청교도와 정의(正義) 인도(人道)의 정신으로 독립전쟁을 통해 건국한 미국이 침략자인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서 조선의 해방은 가능했다. 미일전쟁이 일어나야 조선의 해방은 가능했다. 일본인에 의한 미국의원의 폭탄 공격이 그 계기기 될 수 있었다. 미·일 관계의 악화와 교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한국인들은 미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할 구원자, 천사로 미국을 인식하고 있었다.
  
박재혁이 1920년 8월 일본을 그렇게 자주 드나든 이유가 바로 일본 동경에 폭탄을 터트릴 정보를 탐지하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내 거사와 달리 일본 거사는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였다. 신숙은 미국의원단이 동경역에 도착할 때, “금번 미국의원단의 동양 시찰은 침략적 야심으로써 오로지 일본의 내정을 탐사키 위함이다. 그런즉슨 우리 충량한 일본 신민은 미국인의 이러한 음험(陰險) 정책에 속지 말고 일제 분기하여 적으로 상대하자”라는 전단을 산포하면서 폭탄을 투척하여 다소의 사상자를 내게 되면 그것이 반듯이 국제적 대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언어와 누가 보아도 일본인과 (구별되지 않는) 틀림없는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신숙은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박재혁을 추천받았다. 부산경찰서 투탄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다. 그만큼 긴급한 일이었다. 신숙은 박재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박재혁은 원래 부산 출생으로 일본소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부친이 사망한 후 가계의 빈곤으로 인하여 일본인 상점에 점원으로 종사하였는데, 일본인도 조선인일 줄 잘 알지 못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김원봉이 말하길, 국가를 위하여 상당한 일만 있으면 희생할 결심을 가진 열렬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신숙의 증언 일부는 틀렸다. 하지만 박재혁은 조선인이지만 일본인과 같이 행동할 적임자였다. 그는 그동안 싱가포르나 필리핀 지역에서 상업활동을 일본인 회사에서 하였기에 능숙한 일본어와 함께 일본인 같은 행동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당시 가장 적임자였다. 또한 김원봉이 추천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이니 신숙은 의원단이 동경역에 도착할 일정 약 2주 전에 박재혁을 일본으로 밀파하였다. 신숙은 여비를 송부하여 박재혁을 오게 하고 급하게 폭탄을 구입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박군을 밀파할 때 그 비장강개한 최후의 작별을 아무리 잊고자 하여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나의 머리에 인상이 깊이 있다”라고 신숙은 말하였다.
 
▲ 미국의원단 동경 도착 일본에 도착한 미국의원단을 일본 경찰의 삼엄한 호위 속에 있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출처 동아일보(1920.09.04.)
ⓒ 동아일보
 
미국의원단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27일 하관(下関, 시모노세키), 28일 신호(神戶, 고베)와 대판(大阪, 오사카)을 거쳐 경도(京都, 교토)에 도착했다. 9월 2일 오후 8시에 많은 사람의 환영 중에 동경에 무사 도착하였다. 배일사상을 가진 조선사람들이 조선 내에서의 단속이 너무 심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어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의원단이 동경에 들어오는 전후 약 1시간 동안 일본 경찰은 정복 순사 300명과 경시청의 사복 순사 400여 명이 엄중히 경계하였다. 정복 순사는 동경 정거장에서 제국호텔까지, 사복 순사는 정거장 구내와 호텔 내외를 경계하였다. 일본 경찰은 조선 학생보다 많은 중국 유학생을 더 경계하였다. 중국 학생 3,850명 중 한 사람도 배일사상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엄 경계한 이유는 사전에 조선 유학생들의 비밀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경역에서 제국호텔로 향하는 도중에 태극기, 성조기, 한국독립청년단기를 높이 들고 의원단 탑승차에 향하려 하였던 동경 중앙대학의 홍승로(洪承魯, 24세)), 명규성(21세), 최창익(31세), 최규호(24세) 등이 검거되었다. 또 미국의원단의 일본 도착 후 조선 지방에서 하듯이 독립운동을 실행하려 하였고, 상해 임정에서 비밀사명을 띠고 온 약 40~50명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던 왕연동(王燕同, 동경학우회 회원, 25세), 이장천(李章天, 19세) 등 2인이 검거되고, 정준동(鄭準東)도 같은 계획을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중지하였다. 이들은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유학생 1천여 명으로 조직된 학우회 회원으로 중앙대학 한준동[정준동]을 중심으로 경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오를 짜지 않고 정거장에서 호텔까지 늘어서 일제히 배일의 붉은 기(태극기일 것이다)를 휘두를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배일 중국 학생이 합력하였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동경도 삼엄한 경계를 일본 경찰은 하였다. 박재혁은 동경에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일본에서 단독으로 활동하여야 하므로 문제가 나타났다. 박재혁의 거사를 도와줄 어떤 동지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하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투탄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의 수집과 함께 적지 않는 경비, 그리고 일제의 감시를 뚫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일본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사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또 그가 일본어는 능숙하게 구사하였지만, 일본의 동경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실행 계획 짜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체재 중이었던 미국의원단 일행은 9월 13일 오후 4시 미국 군함 그릿노든호로 귀국하였다. 박재혁은 거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미국의원단이 일본을 떠나기 전에 중국이나 부산으로 가야 했다. 훗날 신숙은 일본에서의 거사가 실행되지 못하여 부산경찰서 투탄을 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8월 31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을 받았다”라는 진술은 박재혁이 동경에서 미국의원단에게 투탄하려던 계획을 숨기기 위한 거짓 진술일 수 있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이후 그의 행적을 찾으려 일본 경찰은 조사하였지만, 그의 동선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자기의 행적을 최소한 진술하였기 때문이었다.

거사를 포기한 박재혁은 중국이 아닌 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재혁의 짐보따리에는 거사를 위한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박재혁은 폭탄을 수건에 싸서 트렁크 밑에 넣어 휴대하고 9월 6일 부산 도착 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그는 본래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연락선으로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상륙해서 알아보니 시모노세키로 가지 않고도 대마도(對馬島:이즈하라-嚴原港)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가는 배편이 있었다. 당시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탈 때나 내릴 때나, 일제 형사들이 조선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위험하였지만, 대마도를 거쳐서 가는 배는 위험성이 적을 것 같았다. 앞으로 동지들이 이용하면 좋을 듯하여 봉함엽서를 보냈다.

“昨日安着長崎(작일안착장기), 商況甚如意(상황심여의), 此諸君惠念之澤矣(차제군혜염지택의), 秋初凉風(추초량풍), 心身快活(심신쾌활), 可期許多收益(가기허다수익), 不可期再見君顔(불가기재견군안), 別有商路比前益好(별유상로비전익호), 硏究則可知也(연구칙가지야). 一九二○・九・四 臥膽(와담) 拜(배)”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상황)가 뜻대로 잘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입니다. 초가을 바닷바람에 몸과 마음이 상쾌합니다. 아마도 좋은 일을 기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그대 모습을 다시 보기를 기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별도로 다른 장삿길이 있어 그 전보다 더 좋을 듯합니다. 연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20년 9월 4일 와담(臥膽) 배(拜)”

편지는 일본 경찰의 검열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평범한 상인의 편지처럼 보이도록 적었다. 하지만 편지 끝에 박재혁이 쓴 와담(臥膽)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줄임말이다. 거북한 섶에 누워 자고 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 하거나 실패한 일을 다시 이루고자 굳은 결심을 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의열단 1차 거사와 일본에서의 투탄 의거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박재혁의 결의를 알 수 있는 말이다. 편지에 좋은 일이란 투탄의 성공을 의미한다. 하지만 거사가 끝나면 다시는 동지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고 하였지만, 마음에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고 거사의 성공은 민족해방은 앞당겨질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동지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위로하고 있다. 편지를 읽은 김원봉과 동지들은 눈물을 꾹 참았다.

편지 끝에 그는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看多¨라고 14자의 문구를 덧붙였다. 그것은 암호(暗號)로 발음 그대로 “연락선(連絡船) 타지 말고 대마도(對馬島)로 간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기에서 하관을 가서 연락선을 이용하기보다는 대마도를 경유하는 경로가 부산 입국에 유리함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박재혁은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훗날 신숙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에 대해 “아. 박 군이여. 동지로 더불어 한번 희생을 결정한 이상 약속한 대로 희생한 것만은 장부의 신의 상 일대 쾌거라 할 수 있으나, 오직 목적물이 아닌 다시 말하면 큰 범을 잡고자 하다가 적은 고양이도 못 잡고 고귀한 생명만을 희생한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며, 이 어찌 천추의 한사(恨事)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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