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출가 전인철은 왜 '과학과 청소년'에 천착할까
연출가 전인철(46)이 이끄는 극단 돌파구가 지난 2월부터 매달 관객과 만나고 있다. 2월엔 ‘돌파구 우주극장-SF 낭독공연’이라는 타이틀로 전인철 연출 ‘최후의 지구인’과 김유림 연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선보였다. 일본과 한국의 SF 소설가 호시 신이치와 김초엽의 단편소설들을 뽑아서 낭독극으로 선보인 것이다. 특히 전인철은 3월 23일~4월 4일 청소년극 ‘날아가 버린 새’의 재공연이 끝나자마자 4월 20~25일 김보영의 SF소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무대화한 동명 연극을 선보인다. 코로나19로 연극계가 직격탄을 맞아 전반적으로 주춤한 상황에서 돌파구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전인철은 “최근 공연이 많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때문이다. 작년 예정됐던 작품들이 코로나19로 취소되거나 단축됐었는데, 다시 일정을 잡는 과정에서 스케줄이 꼬이며 몰리게 됐다”면서 “물론 코로나19 상황에서 공연을 올리는 것 자체가 대학로의 작은 극단에겐 위험부담이 크다. 하지만 무대에 대한 극단 배우들의 갈망을 보면서 작게라도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인철은 근래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이다. 2006년 ‘고요’로 데뷔한 이후 ‘시동라사’ ‘순우삼촌’ ‘목란언니’를 비롯해 ‘노란봉투’ ‘XXL레오타드 안나수이손거울’ ‘피와 씨앗’ ‘국부’ ‘나는 살인자입니다’ 등 다양한 작품을 쉼 없이 연출했다. 특히 2012년 ‘목란언니’, 2014년 ‘노란봉투’, 2017년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그에게 여러 연극상을 안겨준 바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연출하는 그지만 2016년 이후 과학과 SF에 대한 관심을 부쩍 드러내고 있다. 군 제대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공부하기 전에 설계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는 등 이과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인터파크와 재단법인 카오스가 2016년 빛과 뇌를 테마로 두 차례의 과학콘서트를 개최한 적 있어요. 김상욱 정재승 등 과학계 석학들이 참여하고 강연과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는 형태였는데요. 당시 두산아트센터의 추천으로 제가 공연을 연출하게 되면서 ‘과학은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철학’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이후 과학과 SF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강의를 들으러 다니거나 책을 찾아서 읽게 된 것 같아요. 그때 호시 신이치도 알게 됐어요.”
호시 신이치(1926~1997)는 일본 SF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다. 단편소설보다도 짧은 ‘쇼트 쇼트(short-short)’ 형식의 초단편소설 개척자로 전 생애 10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서양의 SF소설과 달리 그의 작품은 짧지만 우화적인 요소와 냉소적인 위트로 가득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인철은 2017년 국립극단에서 호시의 작품 가운데 미래 사회와 죽음을 소재로 한 이야기 8편을 재구성한 옴니버스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일본에도 초청돼 2019년 도쿄예술극장에서 공연됐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무한히 확장된다는 점에서 극장 공간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과학은 인간의 감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좇는다고 생각해요. 극장도 인간의 감각을 벗어난 곳을 그리거든요.”
다만 시각적인 스펙터클에 익숙한 관객, 특히 젊은 층에게 SF를 무대문법으로 흥미있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번에 선보이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원작소설은 남자 주인공이 다른 행성에 사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우주를 떠돌며 쓴 편지 15통으로 구성된 서간체 형식이다. 전인철은 원작 주인공이 남자지만 연극에선 2명의 남자배우와 1명의 여자배우가 맡도록 각색했다. 우주에서의 시간은 남녀의 구분을 없앨 것으로 생각해서다. 이와 함께 공연이 올라가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의 두 면에 영상을 쏘고 다른 두 면은 거울을 부착해 어둡고 끝모를 우주 속에 관객이 있는 느낌을 주도록 만들 예정이다.
“최근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등 다양한 기술이 초래하는 변화가 예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저 역시 동시대의 기술과 관련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물론 과학은 철학인 데 비해 기술은 자본과 관련돼 있어서 작업이 쉽지는 않을 거 같지만요. 다만 국내에서 아트&테크 관련 작업이 많이 이뤄지고 있지만 예술적인 부분에서 늘 아쉬운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려고 해요.”
전인철이 연극과 관련해 과학과 SF에 대한 관심만큼 천착하는 테마는 청소년이다. 그는 청소년극 ‘XXL레오타드 안나수이손거울’ ‘날아가 버린 새’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만날수록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그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느낀다.
“‘XXL레오타드 안나수이손거울’는 어른들이 좋아한다면 ‘날아가 버린 새’는 청소년이 좋아해요. 각각 공감하는 부분이 다른 거죠. 그동안 청소년극은 청소년의 성장을 다뤄 왔는데, 요즘 청소년에겐 공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어른에 대한 청소년 세대의 반감을 우리는 정말 몰라요. 우리 세대가 지금 청소년에겐 버거운 존재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래에 신구 세대 사이의 뜨거운 갈등과 대립이 예상되는데, 우리가 너무 외면하는 것 같아요. 한국 사회가 앞으로 당면할 잠재적 폭탄이 째깍거리는 느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을 만나면 즐거워요. 아마도 미래를 꿈꾸지 않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비록 우연한 작업 계기에서 출발했지만 과학과 청소년은 전인철이 앞으로도 매진할 화두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부터 코로나19를 겪으며 그는 연극 형식의 실험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코로나로 많은 것이 중단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돼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면서 “지난해 말 ‘XXL레오타드 안나수이손거울’을 재연하면서 배우들이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도록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여하는 연극인 셈인데,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계속 시도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가 준 깨달음이 이렇게 연출 형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공연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오는 10월 정식 공연으로 올려지는 ‘최후의 지구인’은 그의 형식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한편 지난해 그는 예술의전당과 함께 ‘XXL레오타드 안나수이손거울’을 웹연극으로 선보였다. 웹드라마처럼 한 편의 연극을 여러 개의 짧은 비디오 클립(약 5~6분 내외)으로 만들어 ‘숏폼’ 콘텐츠로 소통하는 젊은 세대가 즐길 수 있도록 시도했다. 코로나19 이후 시도되고 있는 공연 영상 콘텐츠의 성패에 대해 아직은 평가하기 어렵지만 그는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영상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과학과 기술에 호기심 많은 그는 올해 극단 배우들과 함께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오디오북으로 만드는 작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에선 오디오연극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연극과 오디오 콘텐츠를 연결시키는 그의 작업이 대학로에 새로운 자극이 될지도 모르겠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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