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2021. 4. 16.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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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제는 기독교인을 넘어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괜한 시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노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고 공격당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가사를 고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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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제는 기독교인을 넘어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괜한 시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노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고 공격당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가사를 고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랑이 넘치는 노래 같은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사랑이 빈곤하다. 사랑받으라고 하지만 정작 사랑을 주지는 못한다. 오죽하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을까. 그 이유도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데 있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다.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 상식적 전제도 못마땅하다.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당한 사랑을 받지 못한 데 있다고,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면서 자신에겐 면죄부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늘 바장거리며 일에 매여 살아가는 우리의 불쌍한 일상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사랑하기 힘들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사랑이란 원래 힘이 들면 들수록 고귀한 것이기에 어떤 조건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과거에는 이기적인 인간상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됐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다가 이제는 그런 행태를 아주 옳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특별히 선거와 같은 정치 행위에 있어 그런 성향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대적 정의나 사회적 대의명분, 민족과 겨레를 위한 공적 이익보다는 나와 내가 소속된 계층에 얼마나 유익을 주는가에 따라 투표한다. 이익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손해의 문제다. 조그마한 손해에도 발끈하며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사이좋게 친절하게 지내는 관계였다가도 손해를 본다 싶으면 즉시 지적하고 비난, 공격, 소송까지도 불사한다. 그것은 가족과 형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나 희생을 논할 공간은 점점 더 옹색하기만 하다.

이렇게 자기 이익이 절대화된 사회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역할이 언론과 사법기관에 있다. 그들은 사회문제의 시시비비를 사실에 근거해 공정하게 다루고 판단하며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선도해 나갈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조차도 자기 이익이 모든 판단의 중심에 있다는 게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윤리냐 반윤리냐의 문제보다는 무윤리가 그 특징이라고 한다. 윤리나 반윤리에는 그들 나름대로 논리가 있고 판단의 가치 기준이 서 있지만 무윤리는 그런 논리적 사고나 토론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단지 자신의 느낌과 이익에 충실할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받겠다고 손 벌리는 세계가 아니라 사랑하겠다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계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성경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많지만 사랑받으라는 말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미 사랑으로 창조됐고, 이미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충분히 사랑받았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얼마나 많이 사랑받을 것이냐보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 이토록 사회도, 정치도, 언론도, 사법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희망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로 시작해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로 끝나는 청마의 시가 때마침 불어오는 훈훈한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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