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조선의 공주.. 묘까지 이렇게 방치하다니요
[변영숙 기자]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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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효종 1) 구왕(도르곤)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이자 부하장수인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으나 그 역시 1652년 사망하고 홀로 이국땅에서 홀로 쓸쓸하게 지내게 된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부친 금림군의 간청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한 많은 삶을 살다가 1662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6년 만이었다. 의순공주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
족두리묘를 찾아 가는 길은 말 없이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에서 내비가 목적지 도착을 알리며 안내를 종료했다. 생전 처음 와 본 천보산 자락 낯선 산 밑 동네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의순공주묘는 어디에 있을까 하면서.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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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산 등산로 입구 골짜기 옆 야산, 빌라 뒤편에 버려진 묘처럼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족두리묘의 광경은 처참했다. 반쯤 무너져 내린 봉분은 떼도 다 벗겨져 메마른 흙이 드러나 있었고 군데군데 이끼가 두텁게 덮여 있었다. 상석은 깨져 나갔고 묘비석도 없었다. 내 눈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무덤처럼 보였다.
묘 앞에 의정부 문화원 명의의 안내판이 없었다면 누가 이곳을 조선 공주의 묘라고 할까. 비록 양녀라 하더라도 말이다. 살아서도 기구했던 그녀는 죽어서도 이렇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러려면 차라리 무덤이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두리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의 묘가 있다. 의순공주묘에 비하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주민들 말로는 일 년에 두 차례 빠짐없이 후손들이 와서 묘역 관리를 한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의순공주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일까.
의순공주의 한 많은 삶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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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여인의 수가 최소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은 '환향녀'라며 조롱과 멸시를 당했으며, '더럽다'며 혼인 무효를 요구당하거나 심지어는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남자들이 숱하게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요구는 그치지 않았는데 심지어 조선의 왕녀나 대신의 딸까지도 요구했다.
▲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의 묘 금오동 일대에는 금림군 일가의 묘역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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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림군 이개윤의 딸 애숙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효종의 딸 숙안공주와 동갑이었다. 효종은 숙을 양녀로 삼고 '대의에 순순히 따랐다'는 뜻으로 '의순'이라는 공주 작위를 내렸다.
한편 도르곤은 혼인 예물로 말 600필, 금 500냥, 은 1000냥을 보내왔으며, 청나라의 혼인 관례에 따라 6만여 명의 수행인을 대동하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으로 마중 나와 혼인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 12월 31일 구왕(도르곤)이 돌연 사망하여 의순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곧 그의 형 친왕 보로에게 재가했으나 보로 역시 1652년 2월에 사망하였다. 게다가 도로곤은 사후에 역모죄로 몰려 부관참시까지 당했으니 청나라에서 과부 의순공주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1656년 청나라 연경(오늘날의 북경)에 사신으로 온 아버지 이개윤이 딸이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청나라 황제에게 딸의 귀국을 간청하니 청 황제가 이를 허락하여 의순공주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효종은 돌아온 의순공주에게 매달 쌀을 내려 평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금림군 부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정조를 바치고 두 번이나 재가를 했다'며 비난했으며, 조정과 상의도 없이 딸을 귀국시켰다는 죄로 이개윤을 삭탈관작하였다(효종 실록 16권, 효종 7년 윤 5월 10일). 또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공주의 작위를 빼앗아 이개윤의 딸로 격하시켰다.
의순공주는 어린 나이에 조선 왕실의 안위를 위해 오랑캐 나라로 시집을 갔다. 또 엄연히 첩이 아닌 정비 즉, 대복진의 신분이었음에도 '환향녀'라는 업신과 멸시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6년 후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아버지 금림군은 왜 자진해서 애숙을 청나라로 보냈을까라는 점이다. 후에 이긍익이 쓴 야사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것처럼 금품과 출세와 왕의 환심을 바라고 딸을 판 것인가. 그런 성정이라면 딸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지는 못하지는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들 부녀의 삶이 곧 나라를 빼앗긴 모든 조선 백성의 삶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애달프니, 소설과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것이리라.
실록과 다른 금오동 족두리묘 전설
"... 의순 공주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오랑캐 나라의 구왕에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와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 묘 밑에 장사를 지냈고 그때부터 이곳을 '족두리 산소'라 부르고 있다.
한편, 나라에서는 의순 공주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천보산에 큰당, 작은당, 각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략)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른 봄, 비명에 간 왕족 여인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지낸 다음 농악대를 앞세우고 천보산의 큰당과 작은당 등을 왕복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때부터 '정주당놀이'가 우리 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큰당과 작은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속놀이나 동제의 전통이 끊긴 지 오래다.
▲ 의순공주묘, 일명 족두리묘 족두리묘 에 대한 보호조치가 시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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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묘 옆 빈터에 마을 주민들이 나와 있길래 의순공주묘나 동제 등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한두 분 정도만 '족두리묘'의 존재에 대해 알 뿐 의순공주나 정주당 놀이, 동제 등에 아는 분은 없었다.
10년 이상 금오동에 거주한다는 주민에 따르면, 과거 금오동 일대는 점집과 굿당이 많아서 절골이라 불렸다고한다. 이후 일대 정비 사업으로 굿당들은 이전하거나 철거되었고 당시 꽃동네로 불릴 정도로 많았던 꽃농원도 모두 사라졌다.
▲ 의순공주묘역 의순공주묘는 트럭 너머 야산의 비탈길에 옹색하게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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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의순공주묘는 묘역 정비나 문화재 지정 등 어떤 보호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어 온 듯 보였다. 묘역 건너편에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주민의 말대로라면 의순공주묘는 곧 사라질 터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의 흔적을 찾아 의순공주묘를 방문한다. 의정부시는 의순공주묘와 금림군의 묘에 대해 조속히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청회나 조사위원회 등을 개최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 여부 확인 및 보호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무런 조치 없이 훼손되게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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