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쉴 권리..소득 일부 보장, OECD 중 한국·미국만 없다

이태윤 2021. 4. 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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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파서 일을 쉬어도 소득의 일정 부분을 보장해주는 일명 ‘한국형 상병 수당’을 시범 도입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코로나19 상황에서 시급히 추진해야 할 5대 사회안전망 대책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는 모습. 뉴스1

몸을 다치거나 병이 생겨서 일을 쉬더라도 소득의 일정 부분을 보장받는 ‘한국형 상병 수당’을 시범 도입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보건복지부는 15일 오후 2시 LW컨벤션센터에서 상병수당 제도기획자문위원 회(자문위원회)를 발족하고 제1차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상병수당’ 제도는 노동자가 업무와 관계없는 질병이나 부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소득의 일정 부분 보장해 주는 사회보장제도다.

그간 우리나라의 건강 정책은 ‘소득 보장’보다는 ‘의료 보장’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어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뒤 ‘아플 때 쉴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아 상병수당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파도 참고 출근하는 비율'이 정규직의 15.4%, 비정규직의 18.4%, 1인 자영업자의 22.4%에 달했다.

2020년 12~20차 통합노동패널 데이터 분석. 제공 보건복지부


코로나19가 지역에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프면 쉬기’라는 방역 지침이 시행됐지만, 실제 노동자 입장에서는 임금 보전 없이는 이를 지키기 어려웠다. 지난해 5월 경기도 부천의 물류센터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났을 때 관련 확진자가 의심 증상을 참은 채 일을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OECD 36개국 중 우리나라와 미국만 상병수당 없어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36개국 가운데 상병 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미국의 일부 주(州)뿐이다. 미국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등 일부 주는 상병 주당 제도를 갖추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1969년 상병급여협약을 통해 모든 노동자와 경제활동 인구의 75% 이상에게 최저 52주 이상 이전 소득의 60%를 보전하는 방식으로 국제기준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상병수당 지급의 법적 근거를 명시했으나 아직 시행령 등 하위 법령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앞서 지난 7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서 한국형 상병수당을 도입하기 위한 연구용역 수행 및 시범사업 추진을 발표했다. 같은 달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체결된 노·사·정 사회적 협약에 사회적 논의를 추진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기도 했다.

자문위원회는 강도태 보건복지부 2차관과 신영석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기재부·고용부·금융위 등 관계부처, 의료·고용·복지 등 각계 전문가, 경영계·노동계·환자단체 등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한국형 상병수당의 기본방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할 계획이다.


최소 8055억 원 필요, 9차례 논의 거쳐 내년 시범사업
이번 회의에서는 ▶자문위원회 운영방향 ▶한국형 상병수당 도입 논의를 위한 상병수당 제도의 이해 ▶상병수당 제도 설계 및 시범사업 운영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계획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재원 조달이나 대상자 선정 관련 논의도 필요하다. 2019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 추계에 따르면 상병수당을 도입하려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최소 0.04%(8055억 원)에서 최대 0.1%(1조7718억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이 금액을 조세 방식과 사회보험 가운데 어떤 것을 통해 마련할지, 임금·비임금 노동자 모두 대상자로 포괄할지 등도 논의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회경제위기 대응 시민사회대책위가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관에서 '코로나19 2차 대유행에 즈음하여 동반되어야 할 제도개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유급병가, 상병수당 도입, 유급돌봄 휴가, 감염성 질환 사업주 예방지침 및 처벌규정 법제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뉴스1

상병 수당 대상자로 인정받기 위한 ‘대기기간’은 어떻게 설정할지, 기존 소득의 대체율 산정 방식 등도 논의 사항이다. 대기기간은 치료 기간이 길지 않은 경증 환자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 도덕적 해이를 막는 장치다. 대부분의 국가가 상병수당 대기기간을 ‘유급 병가’ 지원 기간과 연계해 설정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임금 노동자가 상병이 생기면 16일까지는 유급 병가를 받는데, 16일간의 대기기간이 지난 후에도 질병이 이어질 경우 17일째부터 '상병수당'으로 전환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유급 병가 제도가 없어 대기기간을 산출할 기준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김헌주 복지부 건강보험정책국장은 지난 13일 사전설명회에서 “우리나라 사회보장 정책 발전 수준으로 봤을 때는 때늦은 감이 있는, 마지막 남아있는 빈 퍼즐이다”며 “건강보험은 아플 때 치료를 보장하지만, 상병수당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고, 산재보험은 업무상 질병에만 해당하지만, 상병수당은 업무와 무관하게 지원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복지부는 이날부터 12월까지 매월 1회씩 9차에 걸쳐 자문위 회의를 진행해 결정된 사항을 바탕으로 내년부터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위원장을 맡은 강도태 보건복지부 2차관은 “상병수당은 감염병 예방뿐 아니라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방지하고, 근로자가 건강하게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편적 건강보장 달성에 기여하는 중요한 제도”라며 “활발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의 여건과 상황에 맞는 상병수당 제도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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