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놈만 미안하다고 해라" 아수라장 된 청문회장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이번 글은 아내 김형숙씨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변상철, 이희훈 기자]
▲ 동수씨가 가족들의 추억과 아픈 기억이 있던 제주 함덕 집 앞에 다시 섰다. |
ⓒ 이희훈 |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동료 화물 기사들에게 사는 게 힘들다는 연락을 자주 받다보니 동수씨한테도 분노가 쌓이고 있었던 거죠.
2015년 3월 20일 함덕 집에서 처음 자해할 때 상황은 이랬어요. 동수씨 때문에 과외 할 때 주로 아이들이 저희 집으로 와서 수업을 받았는데, 저녁에 근처 광명빌라라는 곳에서 잠깐 수업할 때도 있었어요. 광명빌라에 가서 아이들 과외 할 때마다 동수씨가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는 했는데 자해하던 그날은 오질 않는 거예요. 그날 수업하는 아이 집에서 감자를 얻어서 감자 봉지까지 들고 기다렸는데 동수씨 차가 안 보이기에 처음에는 기다렸죠. 동수씨에게 전화를 해도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결국 큰 딸에게 전화를 해봤죠. 큰딸은 그때 시험 공부한다고 집에 있었거든요. 큰딸에게 "혹시 아빠 집에 있는지 찾아봐" 하니까 "잠깐만" 하더니 안방에서 동수씨 핸드폰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잠깐 있다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아빠, 화장실, 피, 손...".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집까지 뛰어갔어요. 가면서 119에 신고했더니 경찰에 같이 연결이 되었는지 구급대원과 경찰이 동시에 왔더라고요. 구급대원이 도착해서 화장실에 들어가니 동수씨가 자해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변기에 앉아 있었어요. 변기 옆에는 커터 칼이 떨어져 있었고...
저만 병원에 동수씨를 데리고 따라갔어요. 사실 그때 큰딸을 데리고 같이 병원에 가야 했는데 지금도 그게 후회돼요. 작은 딸이 고3이라 도서관 갔다가 밤 9시쯤에 오거든요. 그래서 큰딸에게 "집에 있어라. 좀 있다 동생 오니까" 하고 집에 있으라 했죠. 큰딸은 동생이 집에 와서 화장실 피를 보면 놀랄 것 같으니까 동생 오기 전에 혼자 그 피를 다 닦은 거예요. 그때 피를 닦으면서 큰딸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나중에 도청 소방본부 1년짜리 계약직에 합격해서 종합상황실에서 근무했는데 그 충격으로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둬야 했거든요. 지금도 그것이 미안해요.
자해하던 날 경찰차하고 119 구급차가 오니까 동네가 시끄러워지지 않았겠어요? 우리 주인집 딸이 작은 딸하고 선후배지간이었는데 작은 딸한테 말한 거죠. 작은 딸이 집에 와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 동수씨의 몸에는 고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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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씨와 병원 도착하니까 여기저기서 전화가 얼마나 오는지... '세월호 의인 자살 시도' 막 이렇게 첫 뉴스에 나오니까 언론사가 난리도 아니었어요. 전화가 엄청 왔어요. 논술학원 선생, 친척, 교인들... 세월호 사고 때보다 더 전화가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게 그 뒤로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들의 시작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죠.
첫 번째 자해 후에 함덕 집에서 더 살지 못하고 조천읍 신촌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이사 하고는 동수씨가 큰딸하고 그렇게 부딪혔어요. 큰딸아이는 이사도 했으니 새집이라고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을 거 아니에요. 집을 꾸미려고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하는데 동수씨가 큰딸이 하는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 잔소리를 해댄 거예요. "너는 이거 우리 집도 아니고 남의 집인데 왜 그런 걸 하느냐, 공부 안 하고 왜 그런 걸 하느냐." 분노가 시작된 거예요. 큰딸은 그 신촌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너무 힘들어했어요. 아빠하고 계속 부딪혀야 하니까.
▲ 조용하던 청문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일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동수씨였다. 청문회가 끝날 때까지 증인들은 동수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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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주에서 청문회 올라갈 때만 해도 무슨 일이 있겠나 하며 걱정 없이 올라갔어요. 그날 청문회장에서 내 생애 가장 많은 기자, 방송 카메라를 봤던 것 같아요. 동수씨가 청문회장 들어갈 때 조끼를 입었는데 '나라가 구조하지 않은 세월호에서 살아온 게 죄입니까'라고 글씨가 새겨진 거였어요. 그때가 겨울이니까 겉에 파카를 걸치고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은 몰랐죠. 청문회장 들어가서야 파카를 벗고 그 조끼가 보이게 앉았죠.
저는 사실 집에서 자해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청문회 자리에 앉아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동수씨가 "변명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해라. 한 놈만 미안하다고 해라" 하며 혼잣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청문회가 잠시 휴정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작은 면도칼을 가지고 자해를 했어요.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나중에 동수씨에게 들어보니 이미 집에서부터 챙겨가지고 왔더라고요. 그때 백 몇 바늘 꿰맸던 거 같아요.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하라고 소리치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내가 구급차에 있더라고요. 구급차에서 누군가 숨 쉬라고 하는 말이 들리면서 정신이 돌아왔어요. 병원에 도착해서 혈압 재고 하는 동안 제 옆에 동수씨가 있었나 봐요. 우리가 간 병원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없는데 동수씨가 제가 깨어나지 않으니까 저 깨어날 때까지 수술 안 받겠다고 버텼대요. 제가 깨어나고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친 곳을 꿰맸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바로 녹색병원으로 이동해서 입원을 했어요. 5인실이었는데 다른 환자는 들이지 않고 저하고 동수씨 둘만 있으라고 배려해 주셔서 저희만 그 방에 있을 수 있었어요.
다음날 큰딸, 작은딸이 서울로 와서 같이 일주일 정도 입원실에서 모두 같이 생활했죠. 아이들은 동수씨가 그런 일을 해도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화내기보다는 웃으면서 "잘했어 아빠, 그런데 다음에 또 그러면 안 돼" 하면서 아빠를 위로하듯 타이르듯 했어요.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제 생일날이 돌아와 함께 생일 케이크도 자르고 했던 기억도 있어요.
그렇게 녹색병원에 입원했다가 회복한 뒤 퇴원해서 제주로 돌아와서는 또 혼자 지내기 시작하더라고요. 신촌 집이 학원 했던 건물이라 우리가 지내는 방 중에는 보일러가 안 되는 가건물 방도 있었는데 꼭 거기 가서 잔다는 거예요. 보일러가 안 들어오니 겨울에 얼마나 춥겠어요. 그렇다고 약 먹고 자는 사람을 혼자 자게 할 수도 없으니 제가 옆에서 같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할 수 없이 동수씨 옆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겨울을 같이 보냈어요.
▲ 제주도 함덕 해변의 잔잔한 물결이 네온사인에 비쳐 붉은 윤슬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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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에서 자해했을 때는 세월호 2주기(2016년) 때였어요. 세월호 2주기 때 동수씨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포항에서 대학 다니는 작은 딸네 집에 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면 낫지 않을까 해서 포항으로 갔어요. 거기서 며칠을 보내고 제주로 돌아가려고 포항공항으로 가는데 그날따라 동수씨가 아무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어요. 그때는 동수씨가 청소업체인 '클린하우스'에서 일하면서 한국병원에서 때때로 물리치료받을 때였어요.
우리 차를 공항 근처에다 세워놨는데 차 근처에 빈병이 버려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빈병을 모아다 팔려고 차에 싣고 집으로 출발하려는데 동수씨가 자기는 한국병원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별로 의심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동수씨가 물리치료 받으러 간다고 생각한 거죠. 차 시동을 걸고 혼자 집으로 출발하는데 그날따라 동수씨가 저에게 손을 흔들더라고요. 평소에는 그런 행동을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집에 도착해서 빈병을 창고에 넣어두려고 창고 문을 여는데 그날따라 안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동수씨에게 전화를 했죠. 그런데 전화를 안 받아요.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병을 집에 내려두고 다시 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도청 다니는 조카한테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으니 조카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고모 놀라지 마서에(마세요). 고무부가 도청에 와서 자해 했수다(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즉시 차를 돌려서 도청 쪽으로 가면서 회사에는 출근 못 한다고 전화 넣었어요. 도청으로 가면서 혹시나 하고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더니 동수씨를 한국병원 쪽으로 이송 중이라는 속보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병원으로 갔더니 동수씨가 입원한 병원은 중앙병원이더라고요. 중앙병원에 도착해보니 도청 행정부지사 오고 무슨 국장 오고 해서 난리도 아니었어요. 다행히 동수씨가 도청에 들어가서 자해하려는 순간 근처에 있던 청원경찰이 빨리 제지를 해서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했어요.
동수씨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아픈데도 치료도 안 해주고 신경도 안 써주고 하니까 그랬다"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전까지는 제주에 세월호 생존자가 20명 넘게 있어도 제주도에서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날 이후로 제주도에 트라우마센터가 생기고, 우리 같은 생존자들에게 도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제주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가 탈원(입원한 환자가 병원을 무단이탈하는 것)한 적이 있어요. 전부터 "청와대 가서 내장을 꺼내서라도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겠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어요. 그날 큰 딸은 해수욕장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나는 동수씨 입원한 병원에 가면서 동수씨에게 전화를 하는데 또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입원실에 들어가 보니 동수씨 슬리퍼는 있는데 운동화가 없더라고요.
계속 동수씨에게 전화를 하는데, 사물함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나요. 사물함 안에 동수씨 전화기가 있기에 전화기를 꺼내서 문자 내용을 살펴보니까 제주항공 결제한 것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큰딸에게 연락을 하고 병원 CCTV를 살펴보니 동수씨가 환자복 입고 나가는 게 찍혀 있더라고요.
해수욕장에서 일하다 말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그냥 달려온 딸하고 같이 공항에 가서 보니 오전 11시경에 동수씨가 공항 검색대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CCTV에 나오더라고요. 아, 청와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와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청와대 행정관에게 전화를 했어요. 동수씨가 지금 청와대 앞으로 갈 것 같으니 미리 대비해 달라고요. 그리고 제 페이스북에도 소식을 올려서 누구라도 빨리 청와대 앞으로 가달라고 한 거예요.
오후 1시쯤에 동수씨에게서 '각시 미안해 청와대 갔다 올게.. ♥♥♥♥♥' 내용의 예약 문자가 오더군요. 다행히 동수씨가 청와대에 도착했을 때 여러 사람이 미리 기다렸다가 말려서 심하게 다치지는 않고 바로 세브란스병원으로 갔어요. 우리가 도착해 보니 수술 끝나서 회복하고 있다고 해서 회복실로 올라갔죠.
작은 딸은 KTX 타고 올라왔어요.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이자 동수씨가 처음으로 웃으면서 "미안해, 진짜 다 내려놨어"라고 말하더라고요. 이제까지 동수씨는 '나 예민, 나 트라우마, 나 건들지 마'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전에는 자해를 해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날 청와대에서 자해를 하고 처음 아픔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정말 이것으로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죠.
동수씨가 처음으로 "아빠가 미안해. 딸들 미안해" 하면서 자기 지갑에 있던 커터칼도 치우더라고요. 세브란스병원에서 동수씨와 함께 지내는데 정말 동수씨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사람인 것 같았어요. 정말 편한 표정을 짓는 동수씨 얼굴에 놀랐어요. 그때는 정말 끝인 줄 알았어요.
▲ CCTV-DVR이 설치되었던 세월호 3층 실내의 모습이다. 부서지고 녹슬고 휘어버린 선내의 모습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조사가 이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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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세월호 참사 수사 방해 의혹과 관련해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조사한다고 발표했어요. 그러자 황교안 대표는 사참위에 조사권이 있느냐며 반발했죠. 사참위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규명할 CCTV 영상 저장장치인 DVR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어요. 막 급박하게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여러 일이 진행되던 시점이었어요.
집에서 뉴스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동수씨가 본 거예요. 세월호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감이 막 생긴 거죠.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국회의원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세월호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 같고, 국회의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거보니까 결국 동수씨가 화가 나서 국회를 가게 된 거죠.
국회에 간다는 말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새벽 비행기를 타고 국회 앞에 도착했더라고요.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자해를 시도했나 봐요. 곧바로 구급 소방대원과 경찰이 출동해서 동수씨를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고요.
그날 숲길에서 동수씨가 자해했다는 연락을 받고 딸들하고 같이 서울로 갔어요. 전에도 동수씨가 세월호 진상규명을 주장하며 자해를 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잖아요. 같은 상황으로 재차 입원하게 되니까 세브란스병원 측은 보호병동에 입원하라고 했어요. 동수씨는 "나는 보호병동에 입원할 정도의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날 보호병동에 입원시키는 건 그날(세월호 침몰 당시) 고통에서, 계속 그 시간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라며 거부했어요. 그래서 결국 고려대 안산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기로 했죠.
세브란스병원에서 고대 안산병원으로 가는 동안 동수씨 상황을 병원 측에 알렸어요. 그런데 도착해서 동수씨가 들어가니까 응급실 내에 있던 간호사가 동수씨하고 구급대원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 누구냐"라고 물어봐요. 이미 연락을 한 차라 동수씨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이곳으로 보냈으니 내 이름을 쳐봐라.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쪽으로 가라고 해서 왔다"라고 답했어요. 그래도 간호사가 똑같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니까 결국 동수씨가 "자해해서 왔다"라고 말하면서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동수씨가 흥분하자 주위에 있던 간호사들이 진정하라며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응급실 담당 의사였어요. 갑자기 응급실 담당의사가 나오더니 "내가 여기 응급실 책임자인데 왜 이렇게 시끄럽냐"라고 하길래, 제가 "여기 책임자이세요?"라고 물어보자 "내가 책임자다"라며 반말로 대답을 하더라고요. 동수씨가 흥분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진료 안 할 테니 나가"라며 소리를 질러요. 그러니까 동수씨와 의사 간에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죠. 환자를 안정시켜야 할 의사가 환자를 자극하느냐, 어떻게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느냐고 항의해 봤지만 의사는 계속 그랬어요.
잠시 사라졌던 그 의사가 다시 나타나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동수씨 앞으로 다가와 또 자극하더라고요. 의사가 동영상을 찍으며 다가오자 결국 동수씨가 발로 의사를 밀었죠. 그 의사가 응급의료법 위반으로 동수씨를 고발해서 재판을 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병원의 책임이 어느 정도 참작되었는지 고발 사건은 마무리되었죠.
동수씨는 괴물이 아니에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그런 행동이 나온 거죠. 본인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어요. 동수씨가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내가 세월호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걸 보고 나서 제정신으로 사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정신을 놓으면 세월호 진실은 누가 밝히겠나."
*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주시는 '좋은기사원고료'는 전액 피해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구술 채록 작업에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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