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 信을 위한 복수는 아름다웠을까
원나라 기군상의 희곡 각색 2015년 초연
2019년 가장 보고 싶은 연극 압도적 1위
신의를 위해 늦둥이 아들 바꿔치기
처자식 희생한 후 복수 성공했지만
이데올리기의 허망함만 느낄 뿐..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고대부터 현대까지 소설·연극·영화 등 장르 불문하고 ‘복수’는 매우 흔한 소재 가운데 하나다. 기본 서사는 억울하게 핍박당한 자가 와신상담 끝에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과정이다. 권선징악의 통쾌함이든 비극적 결말이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체는 복수자 자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기존 복수극의 클리셰(cliche·진부한 표현)를 답습하지 않는다. 복수자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데다 특별한 유대도 없는 한 남성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복수의 짜릿함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150분 동안의 공연이 끝났을 때 들린 박수소리는 올해 개막한 여느 공연장보다 컸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원나라 극작가 기군상(紀君詳)이 쓴 고전 희곡 ‘조씨고아(趙氏孤兒)’를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연출해 2015년 초연됐다. 그동안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19년 국립극단이 실시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설문조사에서 압도적 표차로 1위를 기록했다. 지난 9일 개막한 올해 공연은 티켓 오픈날 전석 매진됐다.
극중 배경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BC 221~BC 206)로 영공(靈公)이 다스리던 시기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허수아비 군주로 묘사된 영공 밑에서 야심 가득한 무관 도안고(屠岸賈)가 문관 조순(趙盾) 등 그의 가문 9족, 300여명을 참수하는 멸문지화를 자행한다. 하지만 단 한 명의 핏줄인 조순의 손자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데 그가 바로 조씨고아다.
조씨고아의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극의 주인공인 시골 의사 정영이다. 조씨 집안 문객이었던 정영은 조씨고아 어머니의 부탁으로 갓 태어난 조씨고아를 약상자에 숨겨 달아난다.
조씨고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도안고. 그는 생후 한 달이 안 된 모든 아이를 죽이라고 명한다. 정영은 마흔다섯에 얻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과 조씨고아를 맞바꾼다. 도안고가 자기 아들을 조씨고아로 오인토록 하기 위함이다. 속아넘어간 도안고는 정영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아들을 돌에 세 번 내던져 살해한다.
아무리 ‘충(忠)’ ‘신(信)’ 같은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뿌리내린 당시라 해도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 목숨을 바꿔야 하는 대의명분이란 게 있었을까. 정영은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하오"라며 조씨 가문에 대한 신의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깟 약속, 그깟 의리가 뭐라고, 남의 자식 때문에 제 애를 죽여요! 그깟 뱉은 말이 뭐라고!" 정영이 아이를 바꿔치려 하자 그의 처가 울부짖는다. 정영의 처는 원작에 없는 인물로 고 연출이 현대적으로 해석해 탄생시켰다. 정영의 처는 무대 위에 있는 정영에게 왜 그렇게 결정했느냐고 따져묻고 싶은 관객의 입을 대신한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정영의 선택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과 당시의 사회 구조를 감안해 보면 정영의 내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연민마저 느끼게 된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는 말기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성토하며 일어난 민란으로 멸망했을 만큼 신분차별이 극심했다. 정영은 무의식적으로 체제에 순응한 나머지 필부의 자식보다 재상의 손자를 살리는 게 더 옳은 결정이라 판단한 게 아닐까. 정영의 처는 복수에 성공하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자결한다. 이것도 씨앗의 차이로 살고 죽을 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향한 마지막 저항이었을 게다.
당시 형벌이나 정의관의 토대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통념도 정영의 행동에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할지 모른다. 조씨고아가 살아남지 않으면 조씨 일가의 원한을 누가 풀어주느냐는 말이다. 정영 아들의 ‘희생제의’ 역시 정영을 변호한다. 정영이 아들을 희생시켰기에 진나라에서 태어난 생후 한 달 이내 모든 아이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처자식을 희생해 완성한 복수는 아름다웠을까. 조씨고아는 20년 만에 모든 사실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도안고의 목을 베는 조씨고아. 왼팔이 잘린 채 이를 바라보는 정영의 얼굴에 허탈함만 가득하다. 도안고는 놀라움이나 반성은커녕 권세를 누린 자기의 일생에 대해 예찬한다. 이어 정영의 삶에 냉소를 퍼부으며 죽는다. 조씨고아의 가문은 복권되지만 정영에 대한 포상은 전답 12마지기가 전부다. 그 곁엔 풀이 무성한 아기무덤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정영의 표정만으로도 신의나 복수 따위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 덧없음의 상징인지, 위 아래로 한들거리는 나비를 들고 나타난 묵자(墨子)가 이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피리소리에 맞춰 놀다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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