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세대' 고3 학생, 대학 복학생이 되다

최육상 2021. 4.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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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평범하게 공부하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그 때는 세월호에 대해서 저나 친구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비슷했어요.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함께 슬퍼하고 공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학생들끼리 모여서 촛불 문화제를 진행하다 보니까 마을에 계신 삼촌·이모 같은 형·누나가 진행이나 사회, 기획 같은 것을 아무래도 학생이 맡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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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7주기] 류상윤 학생에게 듣는 아픔과 위로, 공감

[최육상 기자]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고3 친구 네 명의 발길은 7월 땡볕을 뚫고 팽목항을 향했다.
ⓒ 류상윤
   
 전북 순창에서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아 팽목항에 가져가 매단 노란 리본 띠
ⓒ 류상윤
 
그는 평범하게 공부하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그는 공부를 잠시 접었다. 친구들과 노란 리본을 달고 전북 순창군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또래 친구들의 죽음이 너무 가슴 아팠던 탓에, 고3 친구 네 명이서 7월 땡볕을 마다하지 않고 순창에서 자전거와 버스로 사고 현장인 팽목항을 다녀왔다.

당시 18살 고등학생은 어느덧 군대를 다녀와 지금 25살 대학 복학생이 되었다. 세월호 7주기를 앞둔 지난 12일 저녁, 류상윤 학생과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초2 여학생의 외침 "국가·정부가 해 줘야"

류상윤 학생은 7년 전 고3 학생 신분으로 순창군에서 열린 촛불 문화제 사회를 봤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 때는 세월호에 대해서 저나 친구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비슷했어요.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함께 슬퍼하고 공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학생들끼리 모여서 촛불 문화제를 진행하다 보니까 마을에 계신 삼촌·이모 같은 형·누나가 진행이나 사회, 기획 같은 것을 아무래도 학생이 맡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류상윤 학생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학교 공부 외에 추모 문화제 같은 그런 활동을 하는 게 처음이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어떤 꼬마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으로 기억하는데, '비가 오면 학교 갈 때 부모님이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주시는데, 이러한 일(세월호 참사)이 일어났을 때 그러한 부분들을 국가나 정부에서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그렇고, 그 자리에 있었던 주민들도 엄청 많이 울었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류상윤 학생은 고3 신분으로 전북 순창군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 사회를 봤다.
ⓒ 류상윤
 
세월호, 열심히 살아야 하는 동기부여

류상윤 학생은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 대학 진학 후 세월호는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있을까.

"저한테 세월호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근본적인 것들을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지금도 무언가를 하는데 있어서, 그 때 가졌던 마음들이 많은 동기로 작용을 하고 있어요. '세월호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하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세월호 문제를 겪었던 모두가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아픔과 위로, 공감 그런 감정."

세월호 세대로서 세월호는 여전히 큰 아픔으로 남아 있는 걸까. 류상윤 학생은 "저한테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동기부여로 많이 작동되는 것 같다"며 "대학에 와서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연세인들의 모임' 활동이 있는데, 전공학과를 불문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끼리 계속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군대 갔다 온 2년 빼고 함께 연대하며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류상윤 학생의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전북 순창군 적성면에서 살고 있다. 초·중·고를 순창에서 다니고 대학 공부를 위해 아버지와 할머니 곁을 떠난 지 7년 째. 세월호의 기억만큼 고향 순창을 떠난 시간이 늘어간다.

"무엇을 기억하고자…, 되새기면서 지내자"

세월호 7주기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회를 묻자, 류상윤 학생은 휴대전화 너머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긴 침묵 끝에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 저만의 다짐으로 생각을 하자면… (한참 침묵) 뭔가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은 것들이 흐려지기도 하고 희미해지는데… (또 다시 한참 침묵) '그 때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자 했는지 계속 되새기면서 지내자'라는 다짐을 하고 있어요."

류상윤 학생은 전화 통화에서 한 번도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노란 리본은 희생당한 학생들의 아픔과 살아남은 유가족들의 치유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류상윤 학생의 "되새기면서 지내자"라는 다짐에는 희생자 앞에, 유가족 앞에, 사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는 희망이 담겨 있으리라 추측해 본다.
 
 전북 순창교육지원청에 걸린 세월호 추모 현수막과 영화 상영 현수막
ⓒ 최육상
   
 세월호 당시 초등학생이었을 순창여중 학생들도 학교 후문에 세월호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현수막을 걸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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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북 순창군 주간신문 <열린순창> 4월 15일에 보도되는 내용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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