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와 발레.. 공산주의 쿠바의 두 얼굴 [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이희동 기자]
아바나 대성당과 거지
아바나 자유여행 하는 날. 다행히 전날 밤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일찍 떠졌다. 27명 중 절반 넘는 인원이 새벽까지 번갈아 가면서 꽤 많은 럼주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술이 좋거나, 아님 좋은 사람들과 마셔서 그렇거나.
▲ 쿠바의 부적 체 게바라 |
ⓒ 이희동 |
호텔을 나와 걸으면서 가장 많이 마주친 것은 체 게바라의 초상이었다. 우리가 지나갔던 오비스포 거리가 아바나의 중심인 만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체 게바라 상품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반 가정 대문 안쪽에 새겨지거나 걸려있는 체 게바라의 초상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항상 사람들을 굽어보는 체 게바라. 쿠바인들에게 그는 부적이었다. 중국인들이 어디서나 관우 사당을 지은 뒤 복을 바라듯이 쿠바인들은 체 게바라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관우만큼이나 체 게바라도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겨지는 만큼 사람들이 더 모시는 거겠지. 어쩌면 쿠바정부도 예수보다는 체 게바라가 낫다는 생각에 이를 놔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바나 대성당 |
ⓒ 이희동 |
스페인 제국의 중심지 중 하나인 아바나 중앙에 지어진 대성당.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세 유럽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이 스페인 제국의 국교인 만큼 얼마나 공들여 지었겠는가. 아마도 당시 쿠바인들에게 스페인 제국은 정교일치, 총독 관저와 대성당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대성당은 그곳을 구경하려는 여행객들과 성당에서 아이 세례를 받으려는 쿠바 일행들로 인해 북적이고 있었다. 모순이었다. 공산주의 국가 쿠바 한복판에서 아직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당이라.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성당 앞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거지들의 존재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거지라니. 이론적으로 공산주의에서 거지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모든 인민을 먹여주고 재워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거지 존재를 부정했고, 냉전 때는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거지를 예로 들기도 했었다.
▲ 대성당 앞의 거지 |
ⓒ 이희동 |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때 북한의 모습이 그려졌다. 소위 꽃제비라고 하여 수많은 이들이 집 없이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던 그때 그 시절. 그들도 이와 같았겠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도심 곳곳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때의 기억은 북한 사람들에게 한국전쟁만큼이나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북한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조명되겠지.
쿠바의 상징 말레꼰
성당을 둘러본 뒤 말레꼰으로 향했다. 쿠바 오기 전 접했던 모든 여행서적에서 아바나의 상징이라고 지칭하던 바로 그 말레꼰이었다.
말레꼰은 스페인어로 방파제란 뜻이었는데, 일반명사가 고유명사로 굳어져 쿠바를 대표하는 명소가 된 경우였다. 쿠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대부분에는 이 말레꼰이 항상 등장한다고 했다. 내가 봤던 작품으로도 영화 <분노의 질주8>의 배경이 되었고, 송혜교와 박보검이 등장했던 드라마 <남자친구>의 주요 공간이라고도 했다.
▲ 쿠바의 명물, 말레꼰 |
ⓒ 이희동 |
게다가 오늘은 거센 파도로 인한 통행제한 때문에 차들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진들을 보면 저 말레꼰 위로 와이파이를 잡으려는 여행객과 그들을 대상으로 춤과 노래를 선사하는 이들, 그리고 낚시를 하는 등의 현지인들이 뒤섞여 있어야 했는데 썰렁하기만 했다. 대신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방파제를 넘는 바닷물에 무언가를 씻는 노인 한 분이 눈에 띄었다.
무엇을 저리 열심히 씻는 거지? 옆에 가서 보니 아뿔싸, 빨대와 그릇들이었다. 빨대 재사용에도 뜨악했는데 바닷물에 씻는 빨대라니.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쿠바의 위생 관념 수준이 사람에 따라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부디 나의 추측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의 착각이기를.
더 이상 거센 바람에 부서지는 하얀 물보라를 뒤집어 쓸 수는 없었다. 남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말레꼰의 매력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은 채 그 뒤편의 아바나 센트로로 향했다.
▲ 활기찬 아바나 센트로의 거리 |
ⓒ 이희동 |
▲ 무채색 아바나 거리 |
ⓒ 박종삼 |
말레꼰 뒤의 아바나 센트로 지역은 이틀 전 혼자 거닐었던 호텔 부근의 지역과도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현지 분위기가 났으며, 관광객을 배려하는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비스포 거리는 우리의 인사동처럼 이방인을 현혹하는 원색의 상품들 천지였지만, 그곳에는 무채색에 가까운 쿠바인들의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활기차게 과일을 사고파는 이들이 보였으며, 신산한 얼굴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식재료를 파는 이가 보였다. 역설적이지만 여행객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그 태도가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쿠바의 속살을 구경하고 다니는데 어디선가 야무진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건물 안이었는데 쿠바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발레교습소인 듯했다. 검은 머리의 낯선 동양인이 쳐다보든 말든 열심히 발레를 배우고 있는 꼬마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쿠바는 어떤 시스템이기에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발레는 대중화 되지 않은 예술로서, 그래도 돈 좀 있고, 대학 진학과 같은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배우는 장르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쿠바인들은 그리 부유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전 인민이 악기 하나쯤 다루고 춤도 출 수 있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의 교육일까?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로서 쿠바 역시 북한처럼 집단체조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닌 듯했다. 비록 쿠바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북한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듯 보였고,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 성향이 훨씬 더 세 보였다.
▲ 발레를 배우는 쿠바 아이들 |
ⓒ 박종삼 |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쯤 누군가가 뒤에서 우리 일행을 불렀다. 분홍색 올드카 기사였다. 1시간에 40쿡(약 5만 원)이지만 5쿡 정도 깎아주겠다는 그.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1950년대 차를 타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올드카에 몸을 실었고, 그렇게 아바나를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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