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0

이병길 2021. 4. 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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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곳곳 '제2만세운동'.. 통도사 스님, '육혈포 암살단원' 되다

[이병길 기자]

미국의원단,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다

1920년 7월 5일, 미국 의회 상원 3명, 하원 의원 39명, 가족들 74명, 그 밖의 인원을 합쳐 총 123명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 일행이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하였다. 필리핀·중국·식민지 조선·일본을 경유하는 관광과 시찰 명목의 방문이었다. 의원단은 8월 15일에 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남경·북경·천진을 차례로 둘러본 후, 8월 23일 봉천을 출발하여 신의주를 거쳐서 24일 서울로 들어왔다가, 8월 25일 부산을 출발하여 동경으로 가기로 일정계획이 잡혀 있었다.
 
▲ 미국의원단 일행 - 상해임정과 독립투사들은 3.1운동 이후의 침체를 극복하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미국의원단의 방문을 계기로 제2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려했다. 출처 : 동아일보(1920.08.26.)
ⓒ 동아일보
 
이런 정보를 얻은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펴고, 국내에서는 과감한 작탄거사를 벌여서 민심을 격동시켜 대대적인 시위를 유발하며 미국과 세계 여론에 호소한다는 방안이 세워졌다. 중국, 만주, 조선, 일본의 한국인들은 제2차 독립운동의 기회로 간주하였다. 외교적 노력과 함께 관공서 폭파, 요인 암살, 만세 시위, 상가 철시 등이 기획, 시행되었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는 미의원시찰단을 맞아 외교적 노력을 추진했다. 6월 7일 안창호는 임정의 재무차장 윤현진과 내무차장 이규홍을 만나 시찰단 준비를 논의했으나,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 관련 정부 개혁이 우선이라며 회의적 태도를 차장들은 보였다. 하지만 6월 18일 국무회의에서 안창호는 '대미의원시찰단주미위원회'를 소집하여 환영 행사, 진정서 제출, 시위운동 등을 결정하였다.

임정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임정은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아니지만 외교·선전·시위운동도 '평화적 전쟁'이라며 최선을 다했다. 안창호는 미국의원단에게 국내외적으로 항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믈론 의열투쟁도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8월 5일 상해에 의원단이 도착하자 임정은 환영회를 개최하고 미국의원단과 면담하고 진성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미의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조선에 도착하거든 일제의 야만적인 학정과 실태를 살핀 뒤 바른 인식을 갖고 돌아가 달라는 부탁을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미국의원을 만난 안창호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선이 독립하면 동양의 평화는 물론 나아가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자치나 위임 통치가 아닌 오직 독립을 요구한다"라고 하였다.

일제 문화통치의 허구와 폭압성 그리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전력투구하였다. 하지만 미국의원들은 조선은 일본에 속해있어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함으로 인식하면서, 다만 일본의 폭정에는 관심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시찰이지만 여행을 목적으로 한 비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미국의원단의 조선, 일본을 방문 즈음하여 제2차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상해, 북경, 봉천, 평양, 경성, 요코하마, 도쿄 등 의원단이 경유하는 도시의 기차역과 체류지에서 면담, 독립청원서 전달, 경찰서 폭파. 만세 시위, 통곡과 하소연(哀訴)시위, 태극기와 성조기 흔들기, 독립구호, 친일인사 및 조선인 순사나 관리 암살, 상가 철시, 시위와 철시를 선무하는 전단지 살포 등을 기획, 시도하였다.

임시정부와 달리 국내에서는 가열찬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치열했던 배일투쟁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의원단에게 보이지 위한 일련의 투쟁이었다. 당시 일제도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8월 3일 저녁 11시경 여자 폭탄범 안경신 등의 구국모험단이 평남도청의 제3부청사, 평양부처,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평남도청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부서졌다.

8월 24일과 25일 1박 2일 동안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머물렀다. 평양투탄사건으로 일제는 철저하게 치안유지에 전력을 다하였다. 8월 23일과 24일 이완용의 집과 종로경찰서, 서울역에 투탄하려던 광복단군영특별결사대가 거사하기 3일 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부산에 있던 오택은 의원단을 보기 위해 8월 초 경성으로 갔다. 1920년 8월 24일 저녁 8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미국의원단 일행은 상원의원 1명, 하원의원 8명을 포함한 49명이었다. 1박 2일 동안 총독부 방문, 남산공원, 창덕궁, 경복궁, 상품진열관, 총독부 의원(醫院), 의학전문학교, 공업전문학교 등을 시찰하고 25일 저녁 8시경 일본으로 떠났다. 2일 동안 한국인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 통제되었다. 경성 시내는 육혈포로 무장한 기마순사, 평상복 차림의 형사 및 순사들이 경계를 섰고 상점 철시가 있었다.

의원들이 도착한 24일 밤 8시 남대문역, 서소문, 용산 주변의 도로는 수만의 군중들이 늘어섰다. 의원들이 조선호텔로 가는 길을 따라 뒤를 쫓았다. 대한문 앞을 지나자 수십 명의 군중이 나와 만세 구호를 불렀고 경찰은 칼자루와 몽둥이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을지로에서 3000~4000여명 군중이 일제히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양척식회사 쪽으로 달려갔다. 구리개 네거리에서 종로방면으로 오면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를 계속하자,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사람들이 합세하였다.

형사들의 몽둥이로 때리는 소리와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보는 사람의 치가 떨리게 하였다. 형사들은 육혈포를 공중으로 발사하여 해산을 시도했다. 종로에서 40여 명이 체포되었지만, 밤 11시까지 군중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며 만세를 불렀다. 그날 경성에서만 10여 차례의 독립 만세시위가 있었다.

25일에 미국의원단은 총독부 방문을 시작으로 일정을 소화했다. 호텔로 돌아갈 동안 한국인과 만남이나 돌발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가는 철시되었고, 전차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수 십명 단위의 기마경관대와 자동차대가 시내를 쉴새 없이 순회하여 온종일 말발굽 소리와 경적 그리고 미국의원단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의 달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도처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제2의 독립만세 운동이었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25일 오후 3시 30분 국제친화회 주최의 미국의원단 환영회가 청년회관(YMCA)에서 있었다. 의원 참석자가 없는 가운데 사회는 이상재가 보았다. 700여 명의 청중이 하나둘 돌아가던 4시경에 예고도 없이 "가슴에 찬란한 성조기 휘장을 붙인" 헐스맨 의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흥분된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접했다. 윤치호는 "우리 조선사람은 미국의원단을 박해하려는 자 한 사람도 없으니 왜인들의 중상설을 믿지 말고 철저히 자유롭게 조사하여 세계인에게 우리의 참모습을 발표하여달라"고 환영사를 했다.

헐스맨 의원은 "여러분은 우리나라 청년같이 향상의 활기와 광채가 가득하오. 아무쪼록 여러분은 학술과 공업을 힘써 모든 것을 향상케 하여 정의와 인도로 분투하길 바라오."라고 하였다. 연설은 일본 관헌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독립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오택이 행사장을 빠져나가려니 청년회관 문 바깥부터 현관까지 일경이 양측에 칼을 빼들고 늘어섰으므로 통로가 일렬행진 밖에 아니 되어 조금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칼날에 찔릴 정도였다. 현관에 나오니 큰길에는 수만 군중이 입추의 여지 없이 모여 미국인에 대하여 환영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오택은 직감적으로 제2 기미운동이 야기될 줄 알았으나 워낙 경계가 물샐틈없이 심하였으며 일몰부터 예비검속이 수천 명에 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국에게 미국이란

당시 한국인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한국인들은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것"이라는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국인의 일방적인 구애가 미국의원단에게 표출 된 것이기도 했다. 일제는 미국에 대한 조선의 고질적인 사대병이자 '뇌미사상'때문이라고 폄하하였다. "겨우 십여 명을 넘지 못하는 관광객 미국의원에 대하여 하루 저녁 연회를 베풀고 또 한 봉의 뇌물을 주어 간곡한 청원을 하여 조선 독립의 대사를 결행코자하는 저 배일(排日) 조선사람들의 행동"은 어쩌면 사대병일 수 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고난받는 식민지인들에게는 해방의 복음이었다. 미국의원들은 조선사람에게 천사단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당시 미국은 강대국이었고 식민지 조선은 일제에 의해 열등민족으로 낙인이 찍혔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강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그 시대의 운명이었다.

8월 26일 아침 7시 20분에 미국의원단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경찰대와 헌병과 군대로 엄중히 경계하여 조선사람은 한 명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8시 10분 미국의원단은 연락선 신라환(新羅丸)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통도사 스님, 육혈포 암살단원이 되다

1919년 양산 통도사 신평 만세사건으로 경성으로 피신한 신화수 스님은 1919년 4월, 김상옥과 동대문 교회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여사 집에서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였다. 김상옥 주도로 중앙학교 윤익중과 통도사 스님 출신의 중앙학교 박노영(박민오)와 불교졸업반 신화수, 보성중 3학년 정설교, 휘문중 이춘식 그리고 서대순, 김우진, 김화룡, 지주택 등이 가담했다.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했다. 김상옥이 단원을 조직하고 선전과 배달을, 박민오는 편집·취재·논설을, 윤익중은 재정 조달을 담당했고, 신화수는 원고를 작성했다.

신화수(申華秀, 1896~ ?)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통도사 수말사인 고성 옥천사 출신 승려이다. 당시 옥천사는 통도사의 수말사였다. 경남 남해출신의 박민오 스님은 한용선생의 지시에 따라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상해 임정에서 발행한 <혁신공보>, <독립신문>, <신대한>을 경성으로 발송하였다.

1919년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박민오는 "조선인은 조선 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상호협력하여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자유신종보(1호~16호?)>를 제작, 배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중국 요리점 '대관원'에서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을 결의하고 2천 원을 상해 임정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혁신공보>가 자금난에 봉착하고 일경의 감시와 추적, 경제적 곤란 등의 이유로 중국 상해로 임봉순, 김봉신, 74세의 남작 김가진과 같이 밀항한다. 1919년 9월, 박민오는 경성 탑골공원에서 김봉길을 만나, "대동단에서 10월 1일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세 구역으로 나누어 제2 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경부선 선동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양산의 김봉길은 승낙을 하였다. 훗날 제2 독립만세사건과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4월 의용승군 조직과 독립군자금 모집,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상해 망명 등을 추진하는 '철원애국단 사건'에 관련하여 신상완(용주사), 김상헌(범어사) 스님이 검거될 때 백초월 등은 도피하고 박민오는 상해에 있어서 검거되지 않았다.

박민오가 본 상해 임시정부는 실망 그 자체였다. 빈집 같은 임시정부, 파리하고 무기력한 지사들, 빈약한 재정, 기호파니 서북파니 영남파니 하는 지방색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박민오는 앞날을 위해 1919년 10월 남경 금릉대학에 갔다. 그곳에서 다시 상해를 거쳐 1920년 유럽으로 향했다. 7월 대서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1921년 뉴욕항에 도착한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교 정치관계학 박사가 되었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義烈團)이 만들어질 때, 12월 서울에서 신화수 스님은 김상옥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고 총독 및 일인 고관, 그리고 민족 반역자 등을 숙청하기로 하였다. 혁신단은 의열단과 같은 암살단 성격의 단체였다. 김상옥은 총책, 김동수는 무기 공급을 하며 길림군정서와 조선독립군정서에 신문을 보냈다. 윤익중은 문중 땅을 처분하여 재정을 담당하고, 서대순과 정설교는 비밀문서책을, 신화수는 집총대장을, 전우진은 연락책을, 장일진은 사격훈련지도를 하였다.

1920년 6월 와룡동의 신화수 집에서 김동순의 구술에 기초하여 신화수는 '암살단 취지서', '일본고관 경고문', '조선 관리 사퇴 권고문' 등을 작성 인쇄하고 암살 명부도 만들었다. 인쇄는 김상옥이 담당했다. 폭탄 제조를 위해 화약과 약품을 사들이고, 김동순은 권총 3자루와 총알 300발을 가져왔다. 1920년 9월에 길림에 근거지를 두고서 조선에 침입하여 암살을 계획한 대동단 소속의 "육혈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는 8월 24일을 기회 삼아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하여 경성에서 대소동을 일으키려하였다.

암살단장은 한훈(韓焄, 한우석, 30세)이었다. 그는 상해 임정에서 국무총장 이동휘와 여러 국무대신을 만나 '조선군사령부' 결성을 하여 독립군 양성, 결사 암살단 조직하려 모젤식 육혈포 3자루와 탄환 300발을 가지고 경성에 왔다. 마침 김상옥이 암살단을 조직한다는 말을 듣고 같이 미국 의원단이 올 때 암살사건을 벌이기로 하였다. 암살의 제1 목표는 사이토 총독, 총독부 관료, 친일파 암살이었다. 순사 복장 4벌, 2백 개의 태극기와 미국기를 준비하였다. 차량 3대를 준비하여 2대는 사격 요원이, 1대는 탄약과 폭탄을 실었다.

종로를 지날 때 무장사격요원이 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했다. 심지어 경찰 병력이 출동하면 시가전을 벌일 준비도 하였다. 서대순(서일순)과 이운기는 암살요원으로 결의를 다지는 상반신 나체 사진을 촬영하였다.
 
▲ 육혈포암살단원들  ? 미국의원단 방문을 계기로 한훈과 김상옥은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검거되어 실패했다.
ⓒ 이병길
 
임정의 국내 특파원이자 교통부원이었던 명제세는 임정의 국내 연계사업을 하던 중 암살단에 합류하여 연락책과 선전물 인쇄 및 배포를 수행하였다. 시민선동과 만세 부르기는 이근영, 윤기중, 김형규, 윤상보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즉 "제1대는 의원단 및 환영군중에 투탄하여 국제문제를 유발하고, 제2대는 총독부를 엄습하여 투탄 파괴하며, 제3대는 종로경찰서에 난입하여 투탄 파괴하려 하였다." 만약 성공하였다면 엄청난 충격을 일제에게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상옥이 신문발행으로 인한 검거경력 때문에 예비검속을 당했다. 김상옥은 도주하고, 김동순이 체포되었다. 김상옥의 집 비밀벽장에서 암살단 취지문과 암살단 명부, 권총 케이스 등이 발견되었다. 김상옥의 피신을 도와준 이가 영화 <밀정>에 나오는 경기도 경찰부 경부인 황옥(1885~1950?)이라고 한다. 핵심인물인 한훈까지 잠복한 일제 형사에 체포되었다. 결국 거사 전날 모두 검거되어 의거는 좌절되었다. 폭탄 5개, 권총 15자루, 탄알 300개 등을 가진 한우석과 정설교가 체포되고, 신화수도 다른 동지들 11명과 함께 체포된다. 미체포자는 김상옥 등 9명이었다. 김상옥은 은신해 있다가 10월 상해로 떠나 의열단 김원봉과 합류했다.
 
▲ 암살단의 체포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기 전에 일제에 의해 김상옥과 한훈이 조직한 육혈포암살단과 임정에서 조직한 광복단군영이 검거되었다. 출처 : 동아일보(1920년 08월 29일)
ⓒ 이병길
 
"육혈포 암살단 사건"으로 신화수는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 공판 회부되어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공문서위조, 공갈취재미수, 사기 등의 혐의를 받았다.

조선군정서에 가맹하여 조선 내에서 조선독립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권총, 실탄을 휴대하고 경성에 잠입, 암살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취의서, 경고문을 작성, 반포하여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며 총독부 정무총감 암살을 계획하는 등 치안을 방해한 혐의였다. 당시 그는 8월 고향의 모친 위독 전보를 받고 경남 고성에 있었다. 그러나 1921년 11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에 산입하는 판결을 받고 복역을 했다.

미국의원단이 중국, 조선, 일본을 거치는 사이에 박재혁은 김원봉과 만나 모종의 의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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