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술자' 그만 만들자고 만든 로스쿨, 하지만?
[박은선 기자]
[기사 수정 : 14일 오후 1시]
지금부터 당신은 2시간 동안 볼펜을 잡고 10장을 채워야 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아무렇게나 쓰거나 연애편지를 쓰는 게 아니다. 전문용어를 잔뜩 집어넣어 논리적으로, 또 최대한 '예쁘게' 써야 한다. 10장이나 쓰는데 논리와 예쁨까지 기대하다니 그럼 난 천천히 쓰겠다고? 그래도 된다. 다만 당신의 합격은 장담할 수 없다. 빠르게. 남들만큼 아니 남들보다 빠르게. 파스와 손목보호대로 무장하고 한 글자라도 더 꽉꽉 채워서. 그것이 이 시험의 중요한 합격비결이다. 자, 이 시험의 이름은?
답은 사법시험. 사법시험 2차 논술시험에서 2시간 동안 수험생들이 쓰는 답안지는 10장 정도였다. 아는 것이 넘쳐도 필기가 유독 느린 이들에게 이 시험방식은 억울했다. 2007년엔 사법시험 1차만 두 번 합격한 '필기 속도가 느린 수험생'이 속도전 논술시험이 자신의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했다.
사법시험 2차에서 팔목이 고생이라면, 1차에선 눈이 고생했다. 2008년 사법시험 1차시험에선 이른바 기본3법으로 통하는 헌법·민법·형법 과목의 질문과 지문의 글자 수가 총 9만 2870자로 수험생들은 분당 442자를 읽어야 했다. 2009년 1차시험에선 마킹 시간을 고려했을 때 민법의 경우 분당 530자를 읽어야 했다. 그냥 글씨만 읽으면 안 됐다. 객관식 문제에 언제나 등장하는 '판례에 따라 정답을 고르라'는 지시에 따라 답을 찾으며 읽어야 했다. 역시 최대한 빠르게.
수많은 응시자들 중 단 3% 정도만 선발해야 하니 사법시험은 갈수록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사법시험을 총괄하는 법무부 법조인력과장 시절 '8지선다'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우리 법조계와 사회는 고도로 기형화된 속도전, 암기전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법조인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훌륭하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그것이 편견에 가깝다는 것은 한 예능프로에서도 확인된다. 2017년 직업에 관한 TV 예능프로그램 <잡스>의 '변호사'편에 출연한 사법시험 출신인 박주민 의원은, 사법시험 기출 문제를 활용한 '잡스 사법시험'이란 코너에서 MC들은 모두 맞춘 문제를 틀리고 말았다. 당장 다음날 나온 기사 제목은 '잡스 박주민, 실제 사법 기출문제 틀려 굴욕'. 그런데 당시 그가 곤혹스러워하며 한 다음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법시험 본 지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내면 안 되죠."
▲ 2017년 <잡스> ‘변호사’ 편에 출연한 사법시험 출신 박주민 의원은, 사법시험 기출 문제를 활용한 ‘잡스 사법시험’이란 코너에서 MC들은 모두 맞춘 문제를 틀렸다. 그러나 그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청자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
ⓒ JTBC |
우리 사회에서 공부란 자고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뜻 모르고 암기해도 정답만 고르면, 답안지만 채우면 그것으로 족하다. 실제로는 알지 못해도 채점자에게 '아는 듯 보이게' 쓸 수 있으면 되고 같은 내용도 '채점을 잘 받을 수 있는 표현으로' 써야 한다. 사법시험이 특히 그랬다. 사법시험이 진정한 법률가로서의 실력을 기르는 것과 무관했음은 이 시험을 거친 또 다른 변호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시험 잘 치는 공부만 하면 된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 (...) 실력이 아니라 점수 잘 나오는 공부가 필요하며, 얍삽하게 공부하여야 한다. 한정된 시간에 효율적인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중요한 내용의 단순암기 방법이 상책이며 깊이 있는 공부는 사치일 뿐이다."
수험계의 베스트셀러라 할 <불합격을 피하는 법>의 저자 최규호 변호사는 불합격을 피하는 방법을 조언하려다 자기도 모르게 사법시험 등 고시형 시험의 진실을 폭로해버렸다(사실 저자는 사법시험을 비판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걸로 보인다).
그는, 학문하는 자세로 천천히 음미하며 진정한 공부를 하면 기필코 불합격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책을 단권화하는 방법, 기출문제 패턴을 익히는 방법, 답안지를 잘 쓰는 방법 등을 자세히 소개하며 학문 아닌 수험기술을 익히는 것이 수험생의 바른 태도라고 강조한다.
그랬다. 수많은 글자를 빛의 속도로 쏟아붓거나 수많은 글자 속에서 빛의 속도로 정답을 고르는 속도전으로 운영되는 정답이 명백한 표준화시험으로서의 사법시험은, 예비법조인들이 오로지 '시험의 기술'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 사법시험이 2시간 동안 10장 정도를 '빛의 속도로' 쓰는 시험이라면, 변호사시험은 3시간 반 동안 14장 정도를 역시 '빛의 속도로' 쓰는 시험이다. 사진은 변호사시험 유사의 모의시험(민사법 사례)에서 내가 작성했던 답안지들이다. 참고로 변호사시험은, 사법시험 1차시험 + 2차시험 + 연수원시험... 을 4박5일간 한꺼번에 치른다. |
ⓒ 박은선 |
시험의 기술과 법학교육의 붕괴
"학생들은 사시를 염두에 두고 암기 위주로 공부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교수가 고시학원의 강의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강의시간에 틀어주기까지 했다. 사시 제도의 폐해가 너무 컸다. 대학은 정상적인 법학 교육을 포기한 상태였다. 사시 날짜가 가까워지면 대부분 휴강했다. 고시학원 강사가 학교에 와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호문혁 서울대 전 법과대학장은 한탄했다. 서울 법대에서조차 학생들이 교수보다 학원강사의 수업을 선호해 결국 교수들이 학원강사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전국의 법대에선 많은 수업들이 사법시험 준비에 오히려 방해된단 이유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학생들에겐 '사법시험 합격만을 위한 훈련'만이 절실했고 법과대학의 교육은 그야말로 황폐화되어갔다.
그렇게 단순암기와 속도전이 중요한 사법시험 체제는 '사유'하지 않는 시험기술자들만 법조계로 나아가게했고 법학교육을 붕괴시켰기에 로스쿨과 변호사시험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로스쿨과 변호사시험에선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됐을까?
'실력과 변호사시험 합격은 무관하다
유튜브 채널 '유튜버벼농사'의 운영자 '벼농사'. 대형로펌의 현직 변호사라는 그는 '상위 1% 변호사의 합격 비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유튜버벼농사>의 ‘상위 1% 변호사의 합격 비법’ 영상에서 운영자 ‘벼농사’는, 시험을 잘 보려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고 변호사시험 점수는 실력과 무관하다며 기출문제 분석과 암기 스킬 등을 강조한다. |
ⓒ 유튜브 영상 갈무리 |
똑같다. 사법시험을 거친 최규호 변호사가 했던 말과 최근 로스쿨을 거친 '벼농사'가 하는 말이 판박이다. '벼농사'도 변호사시험 합격은 실력 아닌 기술이 관건이란다. 시험기술자들만 양산하는 사법시험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법조인 양성 교육을 하자고 만든 로스쿨이고 변호사시험인데...
또 있다. 앞서 호문혁 전 교수가 개탄한 문제도 그대로 부활했다. 언젠가부터 전국의 로스쿨들생들은 '감사하게도' 값비싼 몸값을 받고 초청된 학원 강사들이 교수들이 내어준 강의실에서 하는 변호사시험 대비 특강을 듣는다. 학원과 계약을 체결해로스쿨생들이 학원 인터넷강의를 저렴하게 공동구매하게 해주는 '감사한' 로스쿨들도 있다.
"원래 암기 자체를 초인적으로 잘 하는 사람도 가끔 있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그냥 책을 싸그리 외워요. 자기가 이해를 못했어도 그냥 글자를 다 외우는 거야. 너무 쉽게. 아니 실제로 제 동기 중에 그런 애가 있었어요. 연구를 아예 안 하고 그냥 외우는데 너무 잘 외우는 거지. 그래서 성적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시험에 아주 특화된 인간인 거죠.
문제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보면 얘기가 전혀 안되는 거야.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필드에 나가 서면을 쓸 때 애를 좀 먹을 겁니다. 연구하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실무에서는 누가 이거 답이라고 이거 외우면 된다고 주는 게 아니잖아요."
'벼농사'도 안다. 변호사시험 상위 1%의 승자가 실무 상위 1%의 변호사를 뜻하지는 않음을. 시험용 지식은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휘발되어가고 변호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토론능력과 글쓰기능력, 아니 그 전에 토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이란 것을.
아니, 그만이 아니다. 로스쿨을 설계하고 도입하는데 나선 이들을 비롯한 우리 사회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로스쿨과 변호사시험에서 변호사의 자격은 그와 같은 진정한 실무능력을 외면한다.
"헌법 제10조의 '국가의 보호 의무' 관련 위헌판례는 0개, 0개입니다. 그러니 지문 끝부분에 '~는 보호 의무 위반의 위헌이다'라고 써있으면 앞부분 읽지도 말고 X입니다. 앞부분 읽지 마세요. 그럴 시간 어딨어요? 그냥 X라고요."
변호사시험 준비 중 만난 놀라운 강의였다. 객관식 문제풀이 속도를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요즘말로 '꿀팁'. 그 덕에 나의 객관식 점수는 일취월장했다. 나의 변호사로서의 능력과 자질도 일취월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상관없었다.
나의 공부는 그저 '합격을 위한 공부'일 뿐 변호사의 능력과 자질 따위를 생각해보는 것은 수험생의 슬기로운 태도가 아니니. 그것이 바로 '기술'이 중요한 변호사시험의 세계이니. 시험기술자만 양산하는 사법시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로스쿨을 만들었건 말건 그것이 '현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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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로스쿨 교육 정상화 및 법조문턱낮추기' 운동을 하는 로스쿨 출신 변호사인 시민기자입니다. 출판예정인 <노무현의 로스쿨은 죽었다>(가제)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제10회 변호사시험’의 합격자 결정 및 발표가 2021년 4월 22(23)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연재가, 제10회 변호사시험을 시작으로 로스쿨과 변호사시험의 정상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법조계와 시민사회 모두를 위한 로스쿨 개혁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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