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고 돈들어 절반 포기..실손보험 청구 왜 아직 종이서류?

안효성 2021. 4. 1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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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A4용지 4억장을 쓰는 곳이 있다. 가입자 4138만명으로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의료보험 청구 과정이다. 실손보험 청구건수 1억여건에 영수증ㆍ진단서ㆍ진료비 내역서 등 필요서류를 곱해 산출한 수치다.

종이 서류 발급 없이 실손보험 청구를 전산화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 중이지만, 의사협회와 보험업계 간의 이견으로 논의가 멈춰있다. 연합뉴스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시간과 자원의 낭비를 막기 위해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종이로 이뤄지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청구 절차가 줄어들기 때문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로 불린다. 이번 국회에서도 관련 내용을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 3건이 발의됐지만, 논의에는 큰 진전이 없다.


실손보험 청구간소화 뭐길래?
실손보험 청구간소화는 환자가 병원에 요청하면, 병원이 실손보험 청구에 필요한 각종 서류(영수증, 진단서, 진료비 내역서 등)를 전산으로 보험사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보험사에 전달 과정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과 병원 간에 구축된 전산망을 거치는 방안이 주로 논의되고 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실손보험 중 손해보험사에 청구된 청구건수(7293만건) 중 종이서류 없이 이뤄진 건 1420건에 불과하다. 전체의 0.002%다. 이때문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종이서류로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하고 있는 상황은 부끄러운 일”(손병두 전 금융위 부위원장)이란 지적도 나온다.


금융당국·보험업계, "소비자·보험사·병원에 모두 좋은 제도"
하지만 청구 간소화에 대한 금융당국ㆍ보험업계와 의사협회의 입장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 이후 논의에 진전이 없는 이유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과 의사협회가 주관으로 지난 12일 열린 토론회를 통해 확인된 양측의 논리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청구 간소화가 소비자와 병원, 보험업계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보험금 청구가 쉬워져 소액 진료비도 청구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가 2018년 1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의 보험금 미청구 비율은 47.5%이다. 미청구 이유로는 증빙서류를 보내는 것이 귀찮아서(30.7%), 증빙서류 발급 비용(24%) 등을 꼽았다.

병원은 각종 서류 발급을 위한 인력과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고, 보험사도 제출받은 서류를 일일이 손으로 전산입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 윈-윈이라는 것이다.

보험연구원이 2018년 기준으로 분석한 실손보험 청구 수단. 종이서류로 직접 청구를 한 경우가 74%였고, 종이서류를 발급 받은 후 이를 촬영하는 등의 방법으로 청구한 경우가 26%였다. 보험연구원



의료계는 비급여 의료 정보 활용 우려에 강력 반대

반면 의료계는 청구 간소화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실손보험은 보험사와 가입자 간의 사적 계약인데, 제3자인 의료기관이 실손보험 관련 서류 전송을 법적 의무로 부담하는 건 부당하다는 게 주요 이유다.

비급여 의료 정보를 심평원이 모으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다. 지규열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청구 간소화를 위해 심평원을 활용하면 비급여 진료 내역을 보다 용이하게 확보할 수 있다”며 “비급여 관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큰 데다 최소한 내부자료로 사용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이런 우려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동엽 금융위 보험과장은 “청구간소화는 국민들이 좀 편하게, 포기하는 일 없이 보험금을 청구하자는 취지”라며 “자동차보험도 동일하게 심평원을 통해 전달하고 있지만 정보 유출 등의 문제가 없었고, 심평원에 모인 정보는 다른 목적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이 발의안 법안에는 심평원이 관련 자료를 축적하거나 사용하는 행위가 금지돼 있다.

우리은행이 지난 1월 출시한‘실손보험 빠른청구 서비스’ 화면. 세브란스병원, 성모병원 등 90여개 주요 대형병원의 경우 서류 발급 없이 청구가 가능하다. 우리은행



핀테크 업체 있는데, 꼭 의무화해야 할까
의사협회는 심평원을 거치지 않고 핀테크 업체를 활용하면 청구 간소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서인석 대한병원협회 보험이사는 “청구 간소화는 핀테크 업체를 중심으로 이미 생태계가 형성된 만큼 이를 더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며 “영수증 등의 사진 2~3장을 찍는 방법으로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의료정보를 전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법적 리스크를 막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한 데다, 핀테크 업체와의 제휴를 통한 청구 간소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취지다.

박기준 손해보험협회 장기보험부장은 “현재 150개 정도의 병원이 자율적으로 청구 전산화에 참여하고 있는데 최소 70~80%는 참여해야 청구 간소화가 의미가 있어진다”며 “전체 의료기관과 약국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요한 법은 모두 통과시킨 거여, 이번에는?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이번 국회를 법안 통과의 기회로 봤다. 청구간소화를 앞세운 각종 핀테크 기업들이 등장해 비대면 청구가 일상화된 데다, 174석 거여(巨與)인 민주당도 해당 법안에 우호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야당에서도 청구 간소화를 담은 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 정무위 법안소위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의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여야 모두에서 반대가 나왔다.“이 법을 강행하는 것은 폭력적인 악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민형배 민주당 의원), “좀 더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어 급하게 처리할 내용은 아니다”(김희곤 국민의힘 의원) 등이다.

국회 정무위는 법안 소위에서는 해당 법안을 다시 논의한다는 방침이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 국회 정무위 관계자는 “야당 의원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있어 여야 합의가 원칙인 소위 통과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며 “대선 정국으로 흐를 경우 이해 관계가 엇갈린 법안의 통과는 더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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