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투박해서 더 끌린다..스트리밍 시대 '카세트'의 부활
‘소니’‘아이와’ 등 1990년대를 풍미했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는 시대의 표상이자 젊음의 증표였다. ‘아디다스’ 삼선슬리퍼, 롤러스케이트와 함께 90년대의 패션·문화코드를 설명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선 잊혀진 물건이었던 카세트가 30여년이 흐른 지금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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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 열풍 타고, 카세트 돌아왔다
지난달 KT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발매했다. 금속 느낌의 은색 외관에 딱딱한 직선으로 디자인된 카세트 플레이어는 그때 그 시절 감성 그대로다. 버튼을 누르고 테이프를 넣으면 ‘딸각’ 소리와 함께 음악이 재생된다. 추억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카세트테이프 앨범도 함께 발매했다. 스톤뮤직 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한 ‘리와인드:블로썸’에는 1990~2000년대 초반까지 사랑받은 명곡을 담았다. 반응은 뜨거웠다. 3월 30일까지 사전 예약이 모두 마감됐고 1차 물량은 모두 완판됐다. KT 관계자는 “뉴트로 시대의 감성에 맞는 장치로 새로운 시장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시도”였다며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게 아날로그 감성의 접근이 반응이 좋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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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만의 음반 시장 귀환
디지털 음원이 대세가 된 음반 시장에선 일찌감치 카세트테이프가 재등장해 세를 불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두아 리파, 빌리 아일리시, 레이디 가가 등 팝스타는 물론 BTS(방탄소년단)·블랙핑크 등 국내 아이돌 그룹도 디지털 음원과 함께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해 발매하고 있다. BTS는 지난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른 ‘다이너마이트’를 카세트테이프로 제작해 판매했고, 지난 여름 복고 열기에 불을 지폈던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프로젝트 그룹 ‘싹스리’ 역시 카세트테이프로 음반을 발매했다. 지난 2003년 이후 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카세트테이프가 약 17년 만에 시장에 재진입한 셈이다.
미국 빌보드와 함께 세계 양대 팝 차트로 꼽히는 영국 오피셜 차트에 따르면 2020년 카세트 판매량은 전년대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음반산업(BPI)의 연말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영국에서만 15만6542개의 카세트가 판매됐다. 2020년 가장 많이 팔린 카세트테이프 앨범은 레이디 가가의 ‘크로마티카’로 약 14000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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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플레이어 찾는 70%가 20대”
일명 팬들을 위한 ‘수집 아이템’으로 일부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카세트테이프가 ‘복고’와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면서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도 보인다.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에 위치한 레트로 기기 편집숍 ‘레몬 서울’에서는 약 700~800여 종의 오래된 음향 가전을 만날 수 있다. 주로 1970~90년대에 발매됐던 각종 전자 기기를 수집해 놓은 곳으로 카세트 플레이어 역시 이곳의 인기 품목이다.
김보라 레몬 서울 대표는 “손님의 약 70%가 20대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많이 찾는다”며 “디지털 음원을 다운받아 들었던 젊은 세대들이 음악이 카세트테이프라는 물리적 형태에 담겨있다는 것 자체를 즐겁고 신기하게 받아들인다”고 인기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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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해진 카세트, 패션계도 환영
카세트가 새로운 문화코드로 등극하면서 패션계에서도 ‘카세트’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3월 프랑스 패션 브랜드 ‘이자벨 마랑’은 2021년 가을·겨울 디지털 컬렉션을 발표하기에 앞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셀럽들의 모습을 예고 영상으로 공개했다.
아예 카세트를 패션 디자인에 반영한 사례도 적지 않다. 샤넬을 필두로, 돌체앤가바나·모스키노·루이 비통 등 여러 럭셔리 브랜드에서 휴대용 카세트나 붐박스(대형 카세트)에서 영감을 받은 클러치와 가방 등을 선보였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카세트 백은 지난 2019년 출시 이후 유명인들의 착용 모습이 잇따라 포착돼 오랜만에 등장한 ‘잇백(it bag·최신 유행 가방)’으로 주목받았다.
카세트의 인기는 지난 몇 년간 패션·문화계에 불었던 ‘복고’ 바람과 궤를 같이한다. 과거의 것을 추억하는 기성세대는 물론, 과거를 새롭게 보는 젊은 세대 모두에게 환영받은 아이템이라는 측면에서다.
이는 카세트 자체의 투박한 매력이 한몫했다. 터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매끈한’ 디지털 시대에 눌러야만 소리가 나고, 테이프를 넣으면 덜컹거리는 테이프의 거친 매력은 그 자체로 신선한 자극이다.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모든 것을 감춘 ‘심리스’ 디자인에 터치식 디스플레이 기기에 익숙했던 젊은 세대들이 어느 정도 부피도 있고 투박한 카세트에 매료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패션계 디자인 트렌드 변화와도 맞물린다. 이 교수는 “어글리 슈즈(투박한 운동화)의 인기부터 넉넉한 ‘오버핏’의 의상을 거칠게 툭툭 걸치는 방식을 선호하는 등 전반적 패션 트렌드도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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