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형수 아들'의 전화, 그에게 힘을 보태기로 했다

박도 2021. 4. 1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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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을 맡다.. "대동강, 여전히 푸르다" 기사 쓰고 싶어

[박도 기자]

 김대중 대통령과 만남(2008. 11.).
ⓒ 박도
 
나와 김홍걸 의원(무소속, 비례대표)은 사제지간이다. 지난해 12월 초 김홍걸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언제 서울 오십니까? 곧 뵙고 싶습니다."
"알았네."

전례가 있었던 터라 가볍게 승낙했다. 며칠 뒤 서울시청 옆 한 밥집에서 김 의원을 만났다. 그는 늘 입이 무거웠다. 그와 자리를 함께하면 말보다 눈빛으로 대화했다. 그런데 그날은 만나자마자 그가 운을 뗐다. 진지하게.

"저의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을 선생님이 맡아주십시오."

뜻밖의 제의라 깜짝 놀랐다.

"나는 적임자가 아닐세. 김대중 정부 당시 총리급이나 장관 또는 고위인사를 모시게."

그러자 그는 기념사업회를 '이전과는 다른, 이 시대정신에 맞는 기념사업회로 발전시켜야 한다' '꽉 막힌 대북 민간교류에 물꼬를 트는 일과 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의 길을 여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새 인물이 필요하다'는 등 속내를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제안을 거절한 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친지에게 상의하자 제자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게 훈장의 도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의 아버지는 고향 선배 박정희 후보보다 김대중 후보 지지자로 대통령 선거철 밀짚모자를 쓰고 얼굴이 까맣게 타도록 선거운동을 한 분이다.
   
 김홍걸 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이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민화협 연대 모임에서 "끊어진 남과 북의 다리를 잇자"는 연설을 하고 있다(2018. 11.).
ⓒ 박도
아버지의 계시

당시 경북 구미사람으로 김대중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말씀이다.

"김대중 후보의 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교류와 평화통일론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는 탁견이다."

아버지는 청년시절부터 민족주의자로 해방공간에서 분단 반대(10.1항쟁)에 앞장 서시다가 교직에서도 쫓겨나고 나중에는 옥고도 치르셨다. 그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났다. 그래서 가족들은 몹시 어렵게 살았고 그 수난은 계속됐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했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대북민간교류사업을 하려는 것은 이 시대 정치인이 해결해야 할 제1의 덕목이요, 숭고한 뜻이다. 네 힘 자라는 데까지 도와라. 작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지 말고 먼 앞날을 내다 보는 거다.'

사실 나는 불효자로 아버지 사후에야 눈물을 흘리는 청개구리다.
   
 상임고문 명패.
ⓒ 박도
사형수의 아들을 만나다

김홍걸 의원이 고등학교 1, 2학년이었던 1979년과 1980년 이태동안 나는 국어교사로 그를 가르쳤다. 그때 김홍걸 학생의 아버지는 10.26사태 후 한때 유력한 대선후보로, 곧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따른 내란죄로 사형수가 됐다. 그 무렵 그는 늘 고개 숙이고 다녔다. 어느 날 그가 교무실로 찾아와 내 책상에 두고간 두 편의 시를 봤다.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아픔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그해 교내문예현상모집에 장원으로 천거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사형수의 아들'이 그새 '대통령의 아들'이 되고 얼마 뒤 무슨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어느 날 퇴근길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듣고 그날밤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는 자네가 이 땅의 시인으로나 아니면 통일운동가로 남북을 오가면서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현대사 특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그런 학자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 관련 기사 : "홍걸군, 그 시절 자네는 문학청년이었지"(2005. 2. 14.)

이후 그는 통일운동가로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맡아 끊어진 금강산 길을 잇기 위한 행사에도 앞장섰다. 또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유골송환 사업도 벌였다. 나는 시민기자로 동행 취재한 적도 있었다.

그는 부모님에게 불효한 점을 속죄하고자 유업을 계승하겠단다. 하지만 매끄럽지 못한 처신(동교동 집 문제)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러다 당을 떠나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평양 대동강(2005. 7. 21. 촬영).
ⓒ 박도
 
두 줄기 강물, 하나가 돼 바다로 흐른다

올해 초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의견을 조율한 결과, 나는 제2선에서 기념사업회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새 이사진은 젊은 새로운 일꾼이 맡는 게 시대정신에도 맞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날 사전 정지작업으로 현안 논의를 하던 중 그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문득 한 자연 현상이 떠올랐다. 

큰 강이 바다로 흐르다가 산이나 모래더미와 같은 퇴적물을 만나면 한동안 두 줄기로 갈라져 흐른다. 그런 뒤 곧 다시 합류한 뒤 바다로 흘러간다. 무쇠솥의 밥도 한동안 뜸이 들어야 제대로 골고루 익는다.

나는 그런 자연의 이치를 되뇌이면서 앞날을 낙관했다. 우리가 좀 더 꾹 참으면서 정성을 다하면 마침내 나라의 통일도 두 줄기 강물이 하나로 합치듯 이뤄질 것이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제2기 이사진 출범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새 임원진은 이사장 조순열(서울지방 변호사회 부회장), 이사 김정기(그린월드 공동의장), 김정호(민화협 체육교류위원장), 서정성(아이안과의원장), 윤석중(전 주미대사관 홍보공사), 정원영(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 조민행(변호사, 법무법인 민행대표), 조철순(남북민간교류협의회 공동대표) 등이다. 실무 중심의 인사로 모두들 의욕이 넘쳤다. 

이날 출범식에서 새 이사진은 "김대중 이희호 두 분의 정신을 이 시대정신에 맞도록 재정립, 그 유지를 계승 발전시켜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통일의 초석을 놓는데 이바지하기"로 다짐했다.

나는 언젠가 김홍걸 의원과 새 이사진이 앞장서 뚫은 그 길로 평양에 가고 싶다. 그리하여 대동강 강가를 거닐며 한 시민기자로 "조국은 하나다" "마침내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 "대동강 물은 여전히 푸르고 잔잔하다"는 특종 보도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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