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의학①] 여성은 '몸집 작은 남성'이 아니다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2021. 4. 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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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유전적 차이 1%.. 성차의학 등 '차이' 중시하는 연구·치료 확산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10종의 약물이 퇴출당했다. 치명적 부작용이 발견됐다. 그런데 퇴출당한 약물들의 부작용 관련 통계를 살피던 연구진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0종의 약물 중 8종의 경우, 여성들에게만 부작용이 집중됐던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원인은 단순했다. 약물 도입 전 임상시험이 남성만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여성들에 대한 부작용은 아예 점검되지 않았던 것이다.

의학이 '성(性)'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한 건 최근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적 판단의 기준은 남성이었다. 여성은 ‘몸집 작은 남성’일 뿐이었다. 의학계에서 이러한 편향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던 상황에서, 저명한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가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차이가 약 1%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2005년). ‘남성 의학’ ‘여성 의학’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후 ‘젠더’를 고려한 의학 연구가 가속화된다. '젠더의학(sex·gender medical)'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의학의 한 축이 됐다.

지난 2005년,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차이가 약 1%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몇 가지 ‘정의’부터 필요하다. 먼저 '성'과 '젠더'를 구분해야 한다. 성(sex)은 성염색체, 유전자에 의해 부여된 형태학적 특성에 따른 분류를 말한다. 젠더(gender)는 남성이나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특성을 반영한다. 쉽게 말해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에 대한 논의를 함축한다. 성과 젠더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혼용된다. 구분 자체에 둔감한 사람들이 많고, 구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성·젠더와 관련된 의학의 명칭, 하위 분류도 혼란을 겪는다. 이 시리즈는 ‘젠더의학’을 ‘총칭’으로 택했는데,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로 꼽히는 주디스 버틀러의 입장을 좇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성(sex)' 또한 '젠더(gender)'라는 사회적 규범 때문에 파생된 것이라 주장한다.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이 무의미하며, 결국엔 모두 젠더라는 범주 안에 포함된다는 의견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젠더의학’을 ‘표제’로 내세울 경우, 젠더의학은 ▲성차의학(sex specific medical)과 ▲성소수자의학(gender transition medical) ▲성학(sexology) 등으로 분류된다. 성차의학이 성별 차이로 비롯되는 질병 양상에 집중한다면, 성소수자의학은 생물학적인 성별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학에 초점을 둔다. 올해 서울대 의대에는 '성소수자 의료'라는 수업이 개설됐을 만큼, 최근 젊은 의학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고 있다. 성학은 인간의 성관계와 관련된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다루는 분야다. 각론으로 진입하자.

◇성차의학=남성과 여성은 의학적 접근도 달라야 한다

성차의학은 앞서 언급한 생물학적인 성 차이를 진단과 치료에 반영해야 한다는 기조하에, 여성의 생식기와 내분비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을 말한다. 초창기엔 생물학적인 성에만 집중했으나, 최근엔 젠더적 요소까지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추세다. 국내에서는 '성차'라는 단어에서 오는 부정적인 느낌을 우려해 '젠더의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성차의학 권위자로 꼽히는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는 "편향성을 지양하는 의학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남녀 모두의 건강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취지를 생각하면 '성차의학'이라는 단어가 더욱 적합하다"고 말했다.

성차의학, 왜 필요할까. 1990년대 후반 ‘부작용 약물’ 10종의 시장 퇴출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니란 사실을 규명한 연구가 5년 전에야 나왔다. 2016년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린 연구를 보면, 약물 부작용이 여성에게 더 빈번하고 다양하며, 보다 심각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임상시험들이 여성 참가자를 포함시켜 성비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긴 하지만, 동물실험이나 세포 기반 연구에서는 성별 차이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

연구에 따르면 약물 부작용은 여성에게 더 빈번하고, 심각하게 나타난다./사진=젠더혁신연구센터 제공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성별특성을 반영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 일명 '젠더혁신법'이 통과됐다. 앞으로는 연구개발에 성별 특성을 고려할 것으로 기대된다. 법안에 따르면 기술영향평가를 할 때 대상 기술의 성격을 고려해 성별 특성 분석을 반영해야 하며, 과학기술통계와 지표 조사·분석에도 성별 등 특성이 반영되어야 한다. 김나영 교수는 "이번 개정안 통과로 남녀 모두를 위한 젠더혁신 연구 확산이 한층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성소수자의학=생물학·사회학적인 성 다른 사람을 위한 의학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학적인 성이 다르다고 느끼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의학도 존재한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학적인 성이 달라 성을 바꾸고자 하는 트랜스젠더는 전문적인 의료진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성전환 수술(성 재배치 수술, Sexual Reassignment Surgery, SRS)이나 호르몬 치료 뿐만이 아니다.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 등 특정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을 예방·치료하거나,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유독 정신질환을 많이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정신과적 치료도 포함된다.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비롯해 다양한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국내에서는 고대안암병원이 대학병원 최초로 성소수자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젠더클리닉을 꾸렸다. 이곳에선 성별을 전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학적 처치를 제공하거나, 젠더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부담없이 치료를 받길 원하는 환자를 보기도 한다. 고대안암병원 젠더건강센터 황나현 교수(성형외과 전문의)는 "모든 성소수자에게 의학적 처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트랜스젠더의 경우 호르몬 치료부터 성전환 수술까지 다양한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며 "최근엔 다른 병원에서도 젠더클리닉이 점차 도입되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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