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북한산] 둘레길에서 히말라야를 상상했다
오르지 않고 왜 둘러갈까. 스물 한 개의 북한산 둘레길 가운데 첫 번째 ‘소나무숲길’ 앞에서 잠시 주춤한다. 우회는 근대와 현대의 습성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미덕은 언제나 직진과 상승이다. 멀리 보고 곧장 질러가는 것, 높이 보고 수직으로 치솟아 가는 것, 그게 거의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주변을 배회하는 건 낙오와 실패의 징후다.
북한산을 둘러가기로 한다. 우이령 초입에서 덕성여대 근처 솔밭근린공원으로 향하는 3.1㎞ 길은 이름값 하듯 소나무들의 군집이다. 많은 이들이 이 곳, 소나무 가득한 1코스에서 우이령에 갈음하는 21코스까지 둘레길 완주를 희망한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시계 방향으로 도는 타원의 길. 이 길을 다 돌고나면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한 바퀴 돌면 이번 생의 잘못이 씻기고…
히말라야였던가. 아시아 대륙의 복판에는 설산(雪山)이었다가 성산(聖山)이었다가 하는 산들이 여럿이고 그 산들 주위론 전설들이 눈발처럼 흩날린다. 사연들 중엔 하늘로 우뚝, 수천 미터를 치솟은 신비의 산 둘레를 도는 트래킹에 얽힌 이야기들도 있다.
이런 식이다. 살면서 산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이번 생에 저지른 잘못이 씻긴다. 깨끗이, 흔적 없이. 이번엔 백팔 번뇌로부터의 유추일까. 사는 동안 108회, 산을 돌고 또 돌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윤회가 끊긴다.
한 바퀴도, 백팔 바퀴도 쉽지 않다. 모질게 마음먹지 않으면 이루기 힘들다. 그러나 보답은 심대하다. 살면서 저지른 잘못이 사라진다. 악덕의 소거는 과거로 소급해, 침묵의 순례 중에 윤회의 악순환까지 끊긴다는 것 아닌가. 이번 생의 초월을 위해, 찬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산을 도는 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숭고하다. 나도 히말라야 순례를 꿈꾼다.
◇정복을 꿈꾸는 이들, 그들을 내치는 산들
그런데 궁금했다. 산은 왜 에두르는 이들만 축복하나. 히말라야 정상에 오른 이들이 죄업을 씻고, 성자가 됐다는 전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 오직 둘러가는 사람들에게만, 눈 덮인 성산은 초월의 기회를 준다. 산을 오르는 일에는 무슨 문제가 있나. 산을 휘감는 일에는 왜 문제가 없나.
자신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은 냉혹하다. 극심한 현기증을 선사하고(고산병), 죽을 지경의 호흡 곤란을 건넨다(저산소증). 내려가라, 내려가라, 내려가라 한다. 산을 오르는 일은 산을 거스르는 일이다. 정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산은 관대하지 않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인간들을 향해, 산은 매서운 한기(寒氣)와 노골적인 노여움을 한꺼번에 뿜어댄다.
오르려는 자는 대등해지려는 자다. 거대한 산은 오만한 이들에게 침범을 허(許)하지 않는다. 내치고, 떨구고, 파묻는다. 에두르는 자, 휘도는 자는 낮아지려는 자들이다. 경건한 눈빛으로, 눈 덮인 정상을 쳐다만 볼 뿐, 오르려하지 않는 사람들. 돌고, 돌고, 돌 뿐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 없이 돌면서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는 동안 자아를 버린다. 죄를 씻는다.
◇기 쓰지 않아도 좋은… 둘레길 산책의 묘미
사유할 것인가, 노동할 것인가. 오래 전 프랑스의 한 신문은 미국에 출장 가 아침마다 뛰어대는 대통령에게 물었다. 산책은 사유, 조깅은 노동…. 문명의 선배인 유럽인들은 그렇게 실용의 미국인, 조깅의 미국인들을 조소했다. 산책과 사유로 일궈낸 유럽의 전통을 왜 욕보이는가, 신문은 꾸짖었다.
꾸짖건 말건 그들의 일이지만, 나도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서서 비슷한 질문을 두어 번 던졌다. 두를 것인가, 오를 것인가. 산책할 것인가, 등산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정복할 것인가. 그래서 스스로를 낮출 것인가, 올릴 것인가….
해탈 아니어도, 사유 아니어도 둘레길 산책엔 커다란 묘미가 있다. 월요일의 일상처럼 기를 쓰지 않아도 그만이다. 채우는 대신 비운다.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 자연과 도시가 맞닿은 경계를 천천히 거니는 즐거움은 또 어떤가. 질타당하기 쉬운 좌고우면(左顧右眄)을, 둘레길은 권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40~50분 걸었을까. 다단한 삶을 휘감듯, 3.1㎞의 길지 않은 첫 번째 둘레길을 유영하고 나니 그새 솔밭근린공원이다. 천 그루의 소나무가 빽빽한 듯 휘영하다. 너무도 한가해 절경에 뒤질 것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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