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균 칼럼] 반도체 전쟁..우리 정부는 안 보인다

임상균 2021. 4. 1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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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 대만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소형 제트기 한 대가 조용히 착륙한다. 미국 HP의 CEO인 엔리케 로레스의 전용기다. 로레스 CEO는 대만 반도체업계 간부들과 몇 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로레스의 대만 긴급 방문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HP는 굴지의 글로벌 IT 기업으로 반도체 기업에는 초대형 고객이다. 그런 HP의 CEO가 직접 TSMC로 추정되는 반도체 회사에 잘 봐달라 부탁하려고 10시간 넘게 비행을 해서 날아온 것이다.

지금 세계 반도체 시장은 한마디로 ‘전쟁’이다. IT·자동차·가전 등 주요 기업들이 반도체를 조달하지 못해 공장을 세우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가전·모바일 제품 판매가 늘고, 차량용 반도체·5G·인공지능·빅데이터 등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업체에 주문이 몰리자 쇼티지가 발생했다. 미국 한파, 대만 가뭄, 일본 지진 등으로 주요 공장의 생산 차질까지 겹쳐 글로벌 반도체 수급은 완전히 공급자 우위로 전환됐다.

이렇게 되자 주요국 정부는 반도체의 안정적 확보를 중대 안보 사안으로 상정하며 직접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칩을 들고 기자회견까지 한 미국이 대표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500억달러(약 56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지원 계획을 밝혔다.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도 미국 정부의 공격적 지원 아래 이뤄졌다. 백악관은 이례적으로 국가안보보좌관이 직접 주재해서 삼성, TSMC 등 주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불러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열기로 했다.

중국은 이미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미국을 자극했다. 2025년까지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독립을 실현한다는 계획이다. 최근에는 한국에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기술 분야 협력도 요청했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패권을 놓고 새 확장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역시 아시아의 파운드리 기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최대 66조7000억원을 투자키로 합의했다. 일본 또한 첨단 반도체의 자국 내 생산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민관합동기구를 신설키로 했다. 일본은 특히 반도체 장비·소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패권주의가 확산되고 자국 내 생산 설비 확보 경쟁이 거세질수록 일본의 입지는 강화된다. 일본 정부는 최근 ‘슈퍼갑’ TSMC의 연구소를 도쿄 인근에 유치했다. 대만의 생산 기술과 자국 장비·소재 역량을 결합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우위에 서겠다는 전략이다.

한국 정부도 움직이기는 한다. 정부는 최근 업계 관계자들을 2차례 불러 회의를 했다. 숫자로 나온 정부 지원은 2020~2022년까지 3년간 2047억원이 전부다. 기존에 잡혀 있던 게 재탕된 것이고, 그나마 절반은 지나갔다. 그 외 ‘파운드리 인프라 증설에 과감한 지원 추진’ ‘중장기 기술 로드맵 수립 착수’ ‘연대·협력 협의 채널 구축’ 등 뜬구름 같은 문구들만 나열됐다.

남들은 대통령이 나서 수십조원을 투입하고, 지원법 만들며 전쟁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기술 개발도 아닌 로드맵 수립에 ‘착수’하는 한가한 상황이다.

더 허망한 소식도 들린다. 차량용 반도체 조달을 지원한다고 주대만 한국대표부와 KOTRA가 대만 현지에서 뛰고 있나 보다. 하지만 판매 당사자인 TSMC는 만나지도 못하고 대만반도체협회를 찾아갔다가 “판매는 회원사가 하는데…”라는 대답을 듣고 돌아섰다고 한다.

[주간국장 sky221@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4호 (2021.04.14~2021.04.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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