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㉔] 일본은 정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일까?

데스크 2021. 4. 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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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수상한 러일전쟁의 결과
MR.ROOSEVELT WATCHES THE JAPANESE TITWILLOWⓒThe Sphere, 02 September 1905, 영국 국립도서관

러일전쟁은 20세기 초반의 세계사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사건 중의 하나이다. 덕분에 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여러 TV 드라마 등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였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드라마에서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군인으로 등장한 주인공 유진 초이는 러일전쟁으로 미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 미 대통령)였는데, 유진 초이의 귀국 명령서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제32대 미 대통령)의 이름이 등장하여 드라마의 오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지만, 필자가 관심있게 본 것은 이 드라마에서 러일전쟁의 결과를 일본의 승리로 단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러일전쟁의 승전국을 정확히 일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이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고 설명한다. 기존의 많은 연구에서 러일전쟁의 결과를 일본의 승리로 서술해 온 것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교과서와 대중문화 매체뿐만 아니라, 보도 매체에서도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서술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주요 신문에서는 러일전쟁의 승전국을 일본으로 서술하고, 일본에서는 당시 주요 지휘관을 영웅으로 칭송하기도 한다.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경우에는 군신(軍神)으로 떠받들어졌고, 일제강점기 경성에도 신사가 건립될 정도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승전국이라는 일본의 태도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이상하다. 일본은 전쟁에 승리했는데, 왜 대한제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을 인정해야 했을까? 왜 영일동맹을 맺으면서도 일본은 영국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조건을 추가한 것일까? 이것은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공고히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적’ 참전이 요구되는 영일동맹은 조금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당시 국제법상 독립국의 고유 권한으로 인정받던 개전권을 일본이 사실상 상실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영국에 종속된 상태였다. 당시 국제 경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금본위 등을 기반으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일본은 충분한 금을 확보하지 못해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배상금을 영국에 맡기고, 이를 담보로 영국 파운드와 연동하는 형태로 엔화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화폐 발행은 당시 영연방이나 영국 식민지에서 주로 취하던 방식으로 급격한 인플레(물가 급등)를 막고, 영국 파운드를 통해 국제 결제 등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영국 자본에 종속되어 독자적인 환율 정책이 어려울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차 영일동맹은 군사적 관계까지 영국에 종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대가는 온전히 일본이 치루었지만, 그 승전의 보상을 차지한 쪽은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열강이었다. 일본이 실질적인 승전국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이른바 ‘아바타’가 되어 러시아와 대리전을 치룬 것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부터 영국과 미국 등의 전쟁이 아닌 자국의 전쟁이며, 그 결과 역시 자국의 승리라고 포장하였다. 자국의 승리로 포장하지 못할 경우 자칫 메이지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이러한 불안은 전쟁 직후 일본 내 상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승전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경제공황’이라는 영국발 실탄에 그대로 직격탄을 맞았고, 심지어 전후 아무런 대가 없는 종전은 일본 정부의 선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러일전쟁은 누가 보아도 청일전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일본 국민이 가족과 동료를 잃었지만, 일본 정부의 대표는 미국의 포츠머스에 감금된 상태에서 러시아 대표와 협상하였고, 결국 단 한 푼의 배상금조차 러시아로부터 받아내지 못한 채 조약에 서명했다. 일본 국민이 보기에도 이것은 패배 이상의 굴욕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 국민은 전쟁 전부터 엄청난 전비(戰費)를 충당하기 위해 교통비를 비롯해 각종 전쟁 세금을 추가로 부담하고 있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조약이 체결되고, 전비 부담이 계속되는 전후 상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연일 전쟁 승리를 선전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승전국 일본이 패전국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은 청일전쟁 이후의 조약과는 전혀 달랐다. 당연히 이러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일본 국민은 해명을 요구하였고, 시위로 맞섰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결국 많은 일본인이 폭도로 변하였다. 그들은 주요 시위장소였던 히비야 공원 등에서 방화를 일으켰고, 곧이어 파출소를 비롯한 관공서를 등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승리 기사를 내놓던 신문사까지 방화하였다. 이른바 ‘히비야 방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폭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에서 개선 행진이 아닌 폭동과 계엄령 선포가 일어난 것이다. 폭동은 진압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1901년에 시작해 러일전쟁 기간 중에도 건재했던 가쓰라 일본 내각은 결국 그 이듬해 총사퇴하였다. 말로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실제로는 대내외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가쓰라 내각이 물러난 이후 1906년 1월 7일 사이온지 내각이 성립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과연 내각 총사퇴라는 일이 일어났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여전히 당시 일본 정부의 선전 속에서 역사를 배우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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