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세월호 생존자의 아내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이번 글은 아내 김형숙씨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변상철, 이희훈 기자]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의 아내 김형숙씨. |
ⓒ 이희훈 |
저는 1968년에 태어난 김형숙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67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남편 없이 가정을 꾸리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던 모양이에요. 제가 입학해야 할 나이보다 1년 늦게 제 입학 신청을 했어요. 남편은 죽었지, 뱃속엔 아이가 있지, 7살짜리 아들, 3살짜리 딸 있는 것 건사해야지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뱃속에서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졸업 때는 세 번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졸업식 날 할머니가 쓰러지셨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졸업식에 오지도 못했죠. 할머니 쓰러지셨다는 소리에 울고, 엄마 없는 서러움에 울고, 졸업식 노래 부르며 울고 이렇게 세 번 울었어요.
집이 가난하니 고등학교 진학할 때도 엄마는 제주 함덕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가길 원했지만 제가 우기고 우겨서 시내에 있는 인문계 여고를 다녔어요. 집안 형편 생각하면 참 철없는 짓이었는데 그래도 공부만큼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더라고요. 그것이 어쩌면 저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여고를 졸업할 때가 되니 이번에는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집안 사정 고려해서 제주대학 야간 행정과를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입학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시험 본 직후에 어머니가 간경화 진단을 받았어요.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서 짐을 챙기러 집에 들렀는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제주대학교인데 합격 축하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합격했다니 일단은 기뻤지만 등록금 낼 일이 막막해졌죠. 결국 등록금 납부 이야기를 할 때 마음을 딱 접었어요. 그래서 "지금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래서 입학을 포기한다"라고 했어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서는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일거리를 찾았어요. 아는 분 소개로 펌프 파는 회사에 취업했죠. 나름 일 잘하고 성실하다며 회사에서 급여도 넉넉히 챙겨주셨고, 칭찬도 제법 받았죠. 하지만 그마저도 어머니 건강이 나빠져 1년 정도 다니다 그만두고 어머니 간호에 매달려야 했어요.
엄마는 2년 만에 돌아가셨죠. 엄마 나이 겨우 58세 되던 해였어요. 엄마 돌아가시고 집에서 장례 치르려고 엄마 방을 치우는데 엄마가 누웠던 침대가 보이는 거예요.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침대도 못 사드리고, 귤 컨테이너에 합판을 얹어 만든 간이침대였어요. 그 침대를 치우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와 아내 김형숙씨. |
ⓒ 이희훈 |
엄마는 돌아가시고 언니도 얼마 있다 결혼한다고 하니 너무 외롭더라고요. 결국 우울증까지 왔죠. 우울한 마음으로 생활하던 중에 교회(김녕교회)에서 동수씨를 만났어요. 잘 까불고, 얼굴도 동안이라 저보다 어린 줄 알았죠.
그때 동수씨는 '5505'번 주황색 택시를 몰던 운전기사였어요. 언니가 남자 친구 만나고 집에 올 때는 꼭 동수씨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에 동수씨를 자주 보게 됐죠. 동수씨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때는 소상이라고, 엄마 1주기 제사를 준비할 때였어요. 제가 간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겼는데, 입원하고 있는 동안 동수씨가 시간 날 때마다 병원에 찾아와서 함께 지내줬어요. 식사 시간 때마다 병원에 들러 같이 밥 먹고 하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지더라고요.
결국 저도 언니가 결혼한 다음 해에 동수씨와 결혼했어요. 제 주변 분들이 "어려서 골골대던 형숙이가 결혼을 다 하네"라며 우스갯소리를 곁들이면서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사실 동수씨는 세월호 사고 나기 전에는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저하고 연예하고 막 결혼했을 때도, 성격이 좀 급하고 욱하는 면은 있었지만 뒤끝은 없는 사람이었어요. 늘 나와 아이들을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저와 결혼할 때도 동수씨는 언니 앞에서 '내가 형숙이와 살겠습니다. 대신 형숙이보다 하루라도 더 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어요. 그랬던 사람이 세월호 사고 난 뒤에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한번은 나에게 "예람이 엄마, 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나약하게 변해가는 동수씨를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아요.
신혼 초엔 동수씨랑 서울에 올라가서 살았어요. 동수씨는 서울 신정동에 있는 싱크대 납품회사에서 성실히 일했어요. 벌이도 괜찮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았는데 동수씨나 저나 몸이 좋지 않아 결국 서울 생활을 포기해야 했어요. 저는 간이 좋지 않고 동수씨는 결핵을 앓은 적이 있어서 서울의 탁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제주에 내려와서 아주버님과 같이 활어 유통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마트에서 수산 코너를 맡아 일도 해보고, 도남동에서 횟집도 했어요. 크게 돈을 벌지는 못하고 빚도 지고 몸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횟집도 몇 년 잘 운영했는데 제 몸이 버텨주질 못하더라고요. 결국 횟집 장사를 접어야 했어요.
그래도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다행히 동수씨는 오빠 소개로 화물운전 일을 소개받아 화물차를 몰기 시작했죠. 저는 저대로 초등학교 아이들 가르치며 제주대학교 평생학습과정에 다니면서 이것저것 배웠어요. 버는 대로 그동안의 빚도 갚으며 지냈죠.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났어요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 |
ⓒ 이희훈 |
그런데 덜컥 세월호 사고가 나서 모든 걸 정리해야 했어요. 세월호 사고 이후로 동수씨 상태가 점점 나빠지니 동수씨 옆에서 24시간 지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세월호 사고 나기 1년 전에 큰 딸이 갑상선 수술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시어머니도 병원에 입원했고, 고모도 버스 타고 가다가 다쳐서 입원을 했어요.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났죠.
시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 저희랑 있게 되면서 시어머니 밥을 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에는 동수씨가 화물운전을 할 때라 운전하면서 어머니 걱정하면 방해될까 봐 내가 어머니를 집에 모시자고 먼저 말했어요. 마침 큰 딸이 집에서 소방 시험 공부할 때라 어머니 머리도 감기면서 돌봐 드렸죠. 큰딸이 정말 고생 많이 했죠. 자기 몸도 아픈데 다른 사람들을 돌보려니 시험공부가 제대로 됐겠어요. 그 생각하면 참 미안하죠.
어머니는 그렇게 2주 정도 집에 계시다가 댁으로 갔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가신 그날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모가 퇴원을 했어요. 그런데 고모가 퇴원을 하고는 몸이 힘들어서 집으로 바로 못 가고 우리 집에 하루 머물다 가겠다고 한 거예요. 그날이 4월 16일이에요.
*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주시는 '좋은기사원고료'는 전액 피해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구술 채록 작업에 쓰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유령수술 방어' 유상범에게 수천 만 원 준 나는 바보였다
- 정경심 측 "검찰 USB끼워 동양대 PC 증거 오염"...검 "포렌식 작업"
- '미얀마 투데이' 만든 MZ세대 부부 "한국 지지 큰 도움"
- 봉사활동 고민인 분들, 현직 교사가 알려주는 꿀팁
- '순창여중 기사' 하나로... 동네방네 소문 다 났습니다
- "10대들이 '아침마당' 타이틀송 듣고 놀라는 이유는..."
- 제 아들 동희가 응급실 수용거부로 죽었습니다
- 국민의힘 "미국 대학 가려면 접종 필수, 당국은 외면"
- 남편 관계 의심해 개인정보 몰래 빼낸 우체국 간부 '들통'
- [영상] 토끼몰이하듯 쫓아 난사, 시민 조준하는 군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