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K반도체..총수 부재 삼성의 딜레마
이재용 부회장 공백 속 '진퇴양난'
[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 정현진 기자] "우리의 경쟁력은 당신들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열린 '반도체 공급망 회복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정상회의'에서 참석자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고 미국의 공급망을 보장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투자를 주문한 것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면서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핵심 업체로서 이 회의에 참가한 삼성전자도 이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바이든의 주문서에 따라 현지 파운드리 공장 증설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압박과 동시에 반도체 주요 수출국인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핵심 의사결정을 책임질 총수의 부재까지 겹쳐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자리·인프라' 주문서 내민 바이든
오스틴 공장 관련시설 추가 검토
인센티브 확대 등 긍정적이지만 美요구로 원치 않는 투자 확대 우려도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세계적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여야 상·하원 의원 65명에게서 반도체 지원을 주문하는 서한을 받은 사실도 공개했다. 행사 뒤에는 ‘미국 일자리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의원과 간담회도 개최했다. 반도체를 비롯해 배터리, 광대역 등 인프라 산업의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천명하면서 자국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글로벌 기업들의 협조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파운드리 공장을 가동하면서 추가로 관련 시설을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1998년부터 운영한 오스틴 공장에는 그동안 누적 162억달러(약 19조원)를 투자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이곳에서 발생한 매출은 3조9131억원으로 현지인을 포함해 직원 3526명이 일하고 있다. 현재 오스틴시에 추가 투자를 검토하면서 20년 동안 세금 8억547만달러(약 9070억원)를 감면해 달라는 요구 조건도 제시한 상황이다. 여기에는 오스틴시가 86억4300만달러(약 10조37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얻고, 직·간접 고용 2973명이 기대된다는 청사진도 담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날 해외기업의 투자를 독려하면서 인센티브 등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삼성전자는 이를 마냥 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를 목표로 국내외 투자를 병행키로 한 상황에서 자칫 미국의 요구에 휩쓸려 원치 않는 투자를 단행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기업 입장에서 인센티브 확대 등 현안을 해결해 준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면서도 "삼성이 평택에 10년 장기 계획으로 파운드리 공장을 추진하고 투자도 확대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압박에 따라 예상보다 투자를 늘려야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짚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날 백악관 회의에 경쟁사인 TSMC에서는 류더인 회장이 직접 참석했다는 점도 삼성의 총수 부재 상황을 더 크게 느끼게 했다. 재계 관계자는 "백악관 화상회의에 참석한 기업 대표들의 면면과 무게감을 고려했을 때 삼성도 이 부회장이 참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면서 "글로벌 기업과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주요 결정을 지휘하는 등의 업무는 결국 총수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다투는 中도
추가 투자 요구 가능성 배제 못해
전략적 판단 필요할 듯
중국도 미국 투자 결정에 있어 핵심 고려 요소 중 하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중국을 직접 언급하며 "미국이 (투자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2015년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10년간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하겠다며 반도체 패권 잡기에 속도를 내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반도체 공급망 확충을 이유로 삼성전자에 추가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중국은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반도체 등 첨단 분야에서 한국이 협력 파트너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중국 시안에 해외 유일 메모리 공장을 두고 있으며 쑤저우에도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시안 공장의 경우 2공장은 2단계까지 증설투자가 마무리돼 올해 하반기부터는 100% 가동이 예상된다. 중국 시안 공장의 매출 규모는 지난해 5조3000억원을 넘어 미국 오스틴 공장 매출보다도 크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투자 확대 등 현안에 대해 함구하는 것도 반도체 수급망으로서 중국의 위상 등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균형 잡힌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 상황이다. 중국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배제할 수 없는 주요국인 만큼 생산기지이자 시장으로서의 가치를 감안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한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정부가 통상분야에서 지원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중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 자칫 한국 기업의 중국 사업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중 간의 충돌은 반도체 업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외교적 문제"라면서 "총수의 결단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직접 반도체 산업의 방향을 진두지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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