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심 맞추려다 본선 망치는 딜레마..박영선도 도리 없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지난 1월 2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박 후보는 문 대통령과 함께 차를 마시는 사진도 올리며 “벌써 대통령님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논하던 그 시간이 그립다”고 적었다. 같은 날 경선 경쟁자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나라다운 나라, 든든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두 사람이 문심(文心) 경쟁을 벌인 이날은 문 대통령의 69번째 생일이었다.
당시 극성 친문 지지층의 극찬을 받았던 발언은 본선에서 족쇄가 됐다. 국민의힘은 선거 기간 내내 박 후보의 “문재인 보유국” 발언을 언급하며 “듣기에 얼굴이 화끈해질 이야기”,“문재인 아바타는 박영선”, “박영선을 찍으면 문재인이 된다”는 역공세에 활용했다.
부동산 이슈에선 문 대통령 정책에 발목이 잡혔다. 박 후보는 내부적으론 종합부동산세 인하 공약까지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론 ‘공시가격 상승률 10% 제한’ 만 내걸었다.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냐”는 핵심 지지층 반발을 우려해 내린 절충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세훈 서울시장이 ‘공시지가 동결’ 공약을 꺼내며 무용지물이 됐다. 박 후보 캠프 관계자는 “선거 기간 내내 정책도 비전도 친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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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심과 민심의 괴리
극성 친문 지지층, 즉 문파(文派)가 민주당의 주류로 떠오른 건 2015년 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온라인 당원제’를 도입한 이후다. 당시 문 대통령에 대한 팬덤을 가진 유권자들이 대거 입당해 당의 주류가 됐다. 민주당 당직자는 “각종 사안에서 투표권을 가진 권리당원은 현재 80만명”이라며 “대부분이 친문 성향이고, 그중 3000명~3만명이 소위 극렬 문파”라고 말했다.
당원 숫자는 늘었으나, 이들의 판단은 민심과 멀었다. 21대 총선을 앞둔 지난해 3월 비례위성정당 창당 의사를 묻는 민주당 권리당원 투표에서 찬성률은 74.1%였다. 4·7 보궐선거 후보 공천을 위한 ‘무공천 당헌’ 개정 투표에서도 86.64%가 찬성했다. 전국민 대상 여론조사 결과는 달랐다. 비례 정당 찬반 조사(지난해 3월 1~2일, 한국일보·한국리서치)에선 응답자 25.7%만이, 무공천 당헌 개정 조사(지난해 11월 1~2일, 아시아경제·윈지코리아컨설팅)에선 39.3%만이 찬성했다. 당심과 민심 간극이 점점 커졌다는 증거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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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에서 드러난 문파의 힘
문파 권리당원의 힘은 당 지도부와 공천의 향배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커졌다. 당내 선거에서 권리당원의 투표 비율이 전당대회 40%, 지방선거·총선 후보 경선 50%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문파에 비토(veto·거부)를 당하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에서, 과거 비주류 정치인까지 모두 강성·친문으로 변했다는 말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게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다. 중도 성향이던 그는 지난해 8월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정치개혁, 권력기관 개혁, 언론개혁을 하자는 게 ‘친문코드’라면 기꺼이 친문에 맞추겠다”며 강성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대의원 투표에서 30% 가까운 득표를 얻은 반면 권리당원 득표율은 14.8%에 불과했다. 결국 전체 득표율 21.4%로 참패했다. 3위 박주민 의원에도 겨우 3.5%포인트 앞섰을 뿐이다. 비문 성향의 한 다선 의원은 “소수 문파의 집단적인 의사표출로 합리적 당원들은 의견개진을 꺼리고, 문파의 의견이 '과다 대표'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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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침 가능할까…이재명·정세균의 딜레마
이재명 경기지사나 정세균 국무총리 등 차기 대선주자들도 문파 권리당원들의 파워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선 예비경선에선 권리당원 투표가 50% 비중(나머지 50%는 여론조사)을 차지한다. 국민경선제로 치러지는 본경선에서도 별도 신청이 필요한 일반 국민과는 달리 권리당원에겐 자동으로 투표권이 주어진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 현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면 문파의 타깃이 되면서 경선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현 정권과 선을 긋지 않을 경우 경선은 이기더라도 본선에서 고전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들 모두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는 평가다.
재·보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문파들은 기존 노선의 고수를 요구하고 있다. 당원 게시판엔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41.08%였고, 박영선 후보 득표율은 39.18%로 별 차이가 없다. 다른 60% 지지율에 눈 돌리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두고는 "보수 진영에서 과거 ‘태극기 부대’가 주도하던 시기와 닮아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힘은 태극기 부대와 결별하지 못하던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선 내리 패배했다. 반면 태극기 부대를 배제하고 중도우파인 오세훈·박형준 후보를 내세운 이번 선거에선 중도 표심을 얻으며 승리했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정치학)는 “집토끼(극성 지지층)의 힘이 세지면 당심과 민심이 괴리되며 대선 승리에서 멀어진 게 지난 보수 정당의 과거”라며 “경선에서 당원 맞춤 전략을 펴다간 본선 승리에서 멀어진다는 점을 대선 주자들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효성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
■ “민주당 주인은 당원”…문파 권한 확대 팔 걷어붙인 강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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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국민을 바라봐야 한다. 강성 당원에 너무 휩쓸리면 안 된다.” “무슨 말이냐. 공당이 당원 의견을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12일 오전 더불어민주당 재선 의원 모임에서 오간 토론이다. 민심(民心)이냐, 당심(黨心)이냐의 논쟁이 민주당 내부에서 증폭되는 모습이다. 민심과 당심의 불일치가 여당의 4·7 재·보궐선거 참패 이유로 지목되고 있어서다.
일단 승기를 잡은 건 ‘당심론’이다. 당초 중앙위원회에서 뽑기로 했던 최고위원들을 5·2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선출하기로 했다. 국민의 냉랭한 시선을 의식해 조용히 최고위원을 뽑겠다는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1호 결정은 “민주당 주인은 당원”이라는 외침에 가로막혀 사흘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
강성 권리당원들에 기댄 강경파 의원들은 "내친김에 전당대회 규칙까지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정 의원은 지난 9일 “현재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권리당원 1인의 투표의 가치는 60대 1에 가깝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박주민·황운하 의원도 “전당대회가 당원 의사에 좀 더 가까운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대의원이 과다 대표되는 문제를 시정했으면 한다”며 이에 동참했다.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현행 전당대회 의결 구조다. 민주당 당헌엔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대의원(45%), 권리당원(40%), 국민(10%), 일반당원(5%) 투표 비율로 선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성 지지층이 다수인 권리당원 비중이 너무 낮으니, 이를 높이자는 이들의 주장이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 후보를 정하는 컷오프(예비경선)에 권리당원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의를 주도했던 김용민 의원은 지난 11일 “당 대표·최고위원 선출 시 예비경선을 중앙위원회로만 하지 말고 당원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친문 중진 정청래 의원도 “이참에 당 대표 선출방식도 바꾸자”며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동안 후보를 추려내는 예비경선엔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 시·도 지사 등으로 구성된 중앙위원들만 참여했다.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강성 지지층의 입김을 막아내는 안전판 역할도 했다. 지난해 최고위원 선거에선 문파 권리당원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는 이재정 의원이 예비투표에서 탈락하는 이변도 발생했다. 강경파 의원의 주장에 대해 “권리당원 투표 비율을 높이자는 건 결국 당을 ‘대깨문(강성 문파 지지층)’ 놀이터로 만들겠다는 의도”(수도권 보좌관)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권리당원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주장은 이날 오전 열린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준비위원회(전준위) 회의에서도 나왔다고 한다.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전준위 회의 직후 “손대기에는 일정이 촉박하다는 의견도 있었다"며 “다음 회의에서 더 논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의 한 의원은 “대선 후보 경선은 국민경선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이번 논의와는 큰 상관이 없다”면서도 “다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특정 그룹이 급작스레 권리당원 권한 확대를 일제히 외치는 게 예사롭진 않다”고 말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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