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학폭과 쌍둥이의 고소,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

김식 2021. 4.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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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전 학교폭력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게시했던 이재영·이다영. 하지만 지난 6일 학폭 폭로자에 대한 법적 대응 의사를 밝혔다. 사진=KOVO 제공

얼마 전 프로야구 모 관계자 A씨와 학폭(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예외없이' 학창 시절 선배들로부터 구타와 괴롭힘을 당했다는 그는 나름의 '학폭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과거 운동부에는 마치 군대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후배를 때리는 문화가 있었다. 분명 잘못이지만, 죄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많이 맞아봤는데 당시엔 그러려니 했다. 그걸 지금 기준으로 벌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체기합이 아닌 개인적으로 지속된 폭력,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말이다."

A씨는 "일상이 된 폭력 때문에 여러 선수가 야구를 그만뒀다. 기량이 정말 뛰어난 선수도 맞는 게 싫어서 야구부를 떠났다"고 술회했다. 꼭 A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폭력 문화가 싫어서 운동을 그만뒀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학폭 때문에 우리는 멋진 스타들과 만나기도 전에 헤어졌는지 모른다.

폭력은 어떻게든 반작용을 만든다. 가장 흔한 형태가 복수다. A씨는 "선배 B는 후배들을 그렇게 때려놓고 라면을 끓여오라고 시켰다. 우리라고 당할 수만 있나? 라면에 빨래 세제를 뿌렸다. 거품이 어찌나 일던지…. 그거 걷어내느라 혼났다"고 했다. A씨와 동기들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의 수법을 썼다. 금자는 교도소의 폭군에게 매일 조금씩 음식에 세제를 넣어 건강을 상하게 했다. A씨는 프로에서 B와 재회했다고 하니, 나쁜 짓을 많이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학폭은 1~2년이면 대부분 끝난다. 그러나 피해자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맞은 사람이 다리를 뻗고 편히 잔다'는 말은 대체 어떻게 나온 건지 모르겠다.

졸업 후에는 학폭 가해자의 영웅담, 피해자의 상흔만 남았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피해자가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 가해자가 프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라면 경제적·심리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지난 2월 프로배구 '슈퍼쌍둥이' 이재영-다영으로부터 시작한 학폭 이슈는 온 사회로 번졌다. 일부 선수는 사과한 뒤 선수 은퇴를 결정했다.

이후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통해 폭로전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들이 나왔다. 축구 선수 기성용은 자신이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는 측과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계속될 것 같았던 폭로는 일단 멈췄다.

반격이 시작됐다. 지난 6일 이재영-다영의 소속팀 흥국생명 관계자는 "두 선수가 학폭 폭로자에 대한 법적 대응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둘은 대형 로펌에서 스포츠와 연예계 소송을 다룬 변호인을 선임, 폭로자를 고소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자신들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던 자필 사과문을 삭제했다. 당시 사과문에 둘은 "학창 시절 잘못된 언행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분들께 대단히 죄송하다.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반성하며 살아가겠다"고 썼다. 흥국생명과 대한민국배구협회는 두 선수에 대한 무기한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다. 두 달이 지난 뒤 이재영-다영 측은 "폭로 내용엔 맞는 부분이 있다.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한다"면서 "그러나 하지 않은 일도 포함됐고, 이로 인한 피해가 크기 때문에 소송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폭로자는 여론전에서 압승했지만, 법정에서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10년 전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아서다. 이 논란은 지루한 진실공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마 조금씩 잊힐 것이다.

과거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데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미래에 아이들이 같은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학폭을 근절할 수 있는 시스템 확립이 중요하다.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는 2월 24일 제4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학교운동부 폭력 근절 및 스포츠 인권 보호 체계 개선 방안'을 의결했다. 폭력을 가한 선수의 선수 선발 및 대회 참가와 대학 입학을 제한하고, 성인이 된 선수의 과거 폭력 사건에도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이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학폭을 저지른 선수들이 앞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겠다"고 밝혔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월 서울 서대문구 스포츠윤리센터에서 프로 스포츠 선수 학교 폭력 사건과 관련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급조한 개선안이 학폭 예방 시스템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스포츠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고(故) 최숙현 사건도 법과 제도가 없어서 일어난 게 아니다. 체육인의 인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고, 실행 의지가 약했던 탓이다.

법치 국가에서는 자력 구제, 사적 보복을 금지한다. 그러나 학폭을 막아줄 제도가 기능하지 않자 폭로 형태의 복수가 시작됐다. '여론전에서 약자'인 학폭 가해자가 오히려 법의 힘을 빌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학폭 폭로 후 해당 운동부 감독·코치 등은 하나같이 "몰랐다"고 말했다. 그들의 무심함이 학폭이라는 괴물을 키웠다. 폭로가 잠시 멈췄다고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다. 문체부의 개선안이 체육 현장 곳곳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강력한 실행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보다 해당 학교·지자체의 의지와 노력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또 때릴 것이다. 또 누군가 복수할 것이다. 이 악순환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김식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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