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 “586, 신념 갇혀 공부 안 해…생각하는 능력 끊겨”
“(유공자 배우자와 자녀에게) 학자금을 주고 주택대출을 지원하는 건 민주화운동의 공(功)을 개인적으로 상속시키는 것”
도가(道家) 철학자 최진석(62) 서강대 명예교수는 ‘민주유공자예우법’을 이렇게 비판했다. 민주유공자예우법은 ‘유신반대투쟁이나 6월 항쟁 참가자도 5·18처럼 민주유공자로 인정하자’는 취지의 법안인데, 법안을 낸 의원 다수가 혜택 대상이 돼 논란을 빚었다. ‘운동권 셀프특혜’ 비판이 터져나오자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최 교수 고향은 전남 함평이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5·18도 겪었다. 그런 그가 ‘민주화 운동을 좀 내버려 두자’는 목소리를 계속 낸다. 지난해 말에도 최 교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저격하는 시를 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도가 철학 핵심인 ‘무위’(無爲·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라)를 실천하는 걸까, 아니면 스타 철학자의 양심을 건 지독한 현실 비판일까. 지난 8일 그를 만났다.
Q : ‘5·18역사왜곡처벌법’이나 ‘민주유공자예우법’ 문제는 뭘까.
A : 노자는 도덕경에서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고 했다. “어떤 공을 세우고 나서 그것을 차고 앉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했다. “네가 만들어 놓은 그것을 네 소유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둘 다 ‘성공의 기억에 갇혀있지 말라’는 말이다. 법안을 보면 5·18을 비롯해 ‘민주화’라는 국가적 유산을 개인적 유산으로 상속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민주화 정신을 훼손하고 그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다.
Q : 법으로 만드는 게 어떤 욕심인가.
A : ‘자기 뜻대로 사회를 끌고 가겠다’라거나 ‘국민을 하나의 생각으로 묶겠다’는 욕심을 표현한 거다. 과거 역사교과서 논란 당시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하면 안 된다’며 국정교과서를 반대한 사람들이 ‘5·18왜곡처벌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면 앞뒤가 안 맞는다. 다른 해석 자체를 막는 건 자기모순이다.
Q : 이런 법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국가보안법과 닮았다는 얘기가 있다.
A : 특정 이념에 갇힌 양극단의 공통점은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생각(사유)이 끊겼다는 점에 서로 닮아간다. 극단주의자들은 한번 주입된 신념을 확고한 지위로 믿고, 그 진리를 누가 더 과격하게 수행하느냐에 골몰한다. 그래서 이런 정치행위자들은 진영에 갇힌다. 이렇게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정해진 이념(신념)을 반복·확대·재생산만 하면 되니까. ‘생각’은 거추장스럽다.
Q : “염치와 부끄러움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는데.
A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염치와 부끄러움이다. 이걸 모르는 것 역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다. 생각이 없으면 과거 행동과 말을 돌아보지 않는다. ‘586’ 집권 세력의 말 바꾸기, 거짓말도 결국 과거 신념에 갇혀서 생긴 문제다. 권력을 얻고 새로 공부를 안 하니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졌다.
Q : 과거에 갇힌 권력이 문제일까.
A : 질문하고 새로운 답을 얻는 ‘미래’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과거에 갇혔다. 살면서 남의 생각만 받아들여서 이렇게 됐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우리는 대답하는 삶을 살았다. 이미 (답이) 있는 ‘과거’를 다루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게 과거를 한 점의 오차 없이 따지고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훈련해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생각으로는 해결될 ‘과거’는 없다. 과거 문제를 이렇게 풀려는 건, 현재 생각을 과거에 덧씌우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크다.
Q : 국민 다수가 ‘적폐청산’ 위해 문 대통령 뽑았다. 과거 돌아 볼 명분 있지 않나.
A : 아이러니하게 정치(政治)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르게 한다(正)’는 말이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듣기엔 정의롭고 아름답지만 ‘바르게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정치는) 선·악으로 나뉜다. 심지어 국민도 악으로 규정한다. 얼마 전 그만 둔 대통령 비서실장이 다른 주장을 편 사람을 두고 “살인자”라고 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비정상의 정상화’ 이런 말도 아름답지만, 분열·폭력, 일방통행식 정치를 만든다. 언론·검찰 장악하는 게 적폐면 장악을 안 하면 되는데, 적폐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장악을 시도한다.
Q : 정권 바뀔 때마다 도돌이표다.
A : 박근혜 정부 때 일어난 문제가 문재인 정부에서 그대로 반복됐다. ‘이게 나라냐’ 했는데 ‘이건 나라냐’라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 비판 세력(야당)과 비판받는 세력(여당)의 수준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586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집단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아는 훈련이 됐나. 사고수준이 월등히 높나. 민주와 자유의 감수성이 집권세력보다 높을까. 우리한테 필요한 건 상승과 도약인데 20년 가까이 좌우 왕복운동만 하다 세월을 보냈다.
Q : 어쨌든 재보선에서 서울·부산은 야당을 선택했다.
A : (야당이) 서울·부산시장 선거에서 이겼다. 이 승리를 이끈 집단이 대한민국을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으로 이끌 저력이 있을까. 그 저력이 없어서 권력을 뺏겼는데, 뺏긴 시간 동안 제대로 학습이 됐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한계가 많고 그걸 반성하지 않고 유지한다. 불행이다.
Q : 많은 사람이 이런 진영싸움에 신물 난다고 한다.
A : 우리나라에 진보와 보수는 없다. 이념과 이론으로 나누는 게 무의미해졌다. 낡은 진보와 낡은 보수만 있다. 각자 할 일을 상대방이 한다. 인권 문제는 주로 진보가 다뤘는데, 북한 인권문제는 보수가 다룬다. 진보는 젠더 문제를 일으킨다. 국가에 로열티(충성)가 철저해야 할 보수는 어떤가. 국방과 조세 문제에서 철저할까. 전혀 아니다. 보편적 가치들을 이렇게 정치 공학 안에서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 품위를 잃었다.
Q : 도약을 위해 뭘 해야 할까.
A : 건국·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진 직선적 발전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끝났다고 본다. 이후 약 20년은 통치자 생각 따라 국가 자산을 이리저리 재배치했을 뿐이다. 그 사이 건국·산업화·민주화 세력은 권력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민주화 다음 아젠다를 못 정해서 벌어진 일이다. 민주화 세력이 도태되고, 새로 나타난 누군가가 다음 아젠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들이 운동권 시절 관념으로 새 세상을 움켜쥐고 있다.
Q : 현실적인 대안은.
A : 기존 정당이 아닌 제3세력의 등장. 이게 현실적으로 물론 어렵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권 교체 같은 정치 공학적인 문제에만 갇혀 생각할 순 없다. 그러면 우린 계속 박근혜와 문재인 대통령을 번갈아가며 선택할 수밖에 없다. 현실성이 없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안 할 일이 아니다.
Q : 남은 임기 1년, 문 대통령은 변할까
A : 살면서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고친 걸 본 적이 없다. 남은 1년 동안 지금과 다른 행보를 하거나 잘못을 수정해 갈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영상=정수경·조은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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