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투성이 무심한 낙서, 그 안에 깃든 자연스러움

이은주 2021. 4. 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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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열 개인전 '은유의 섬'
동심 소환한 노화가의 24점
오세열, 무제, 2020,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x9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지난 가을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 수북하게 쌓인 잎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 ‘무제’(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x145.5cm. 노란 바탕에 숫자가 빼곡히 쓰여 있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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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화폭에 아이가 반복해 써넣은 듯한 숫자가 가득하다. 어릴 적 초등학교 교실의 칠판이 떠오르기도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낙서하던 공책이 기억난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숫자와는 거리가 먼 손의 흔적, 서툶과 정성 사이, 놀이와 공부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간. 오세열(76) 화백의 그림은 멀어진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 학고재갤러리에서 오세열 화백의 개인전 ‘은유의 섬’이 8일 개막했다. 아이가 무심하게 낙서한 듯한 숫자와 이미지들이 떠다니는 그의 그림은 듬성듬성 여백 투성이지만 그 자체로 풍성하고 완결해 보인다.

전시장에서 만난 오 화백은 “아이들은 생각하면서 낙서하지 않는다. 신이 나서 하고 싶은대로, 손이 가는 대로 끄적인다. 가장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그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잘 그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잘 그리는 그림은 싫증만 난다”며 “이제 어른이 된 몸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순 없다. 난 흉내만 내는 것”이라며 웃었다.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45.5x112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0, 캔버스에 혼합매체, 53x4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x9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7년 전 목원대 교수직을 마무리하고 터전을 경기도 양평으로 옮긴 그의 그림엔 자연이 묻어 있다. 노란 바탕의 그림 ‘무제’(2021)는 지난가을 작업실 인근 용문사 땅바닥에 쌓인 은행잎을 그린 그림이다. 눈 부신 햇살 반, 숫자 반. 그는 “숫자는 어릴 때 무엇인가를 새로 익히던 첫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몽당연필을 쥐고 숫자를 쓰던 시절부터 시작해 우리는 평생 숫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산다”고 한다. 투박한 함지박에 그린 인물 그림도 눈에 띈다. 누군가에게 전해줄 꽃을 허리춤에 감추고 표정 없이 서 있는 소년의 모습. 코나 입 등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을 보며 수줍거나 외롭거나 설레는 소년의 감정을 맘껏 상상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 된다.

“동심을 흉내”낸 노화가의 작업은 비례와 균형 등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계산된 여정이다. “그냥 써내려간 숫자는 아니다. 거친 것과 고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등 조형의 변화와 리듬을 생각했다”는 작가는 “화면 안에 선의 변화가 핵심이다. 회화적인 요소가 풍성해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전시한 24점 중 작가가 “내가 회화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소개한 작품이 있다. 캔버스에 작은 스테인리스 스푼과 색칠한 플라스틱 뚜껑을 붙여놓은 ‘무제’(2018)다. 길바닥에서 주운 것과 그의 시선을 끌었던 일상의 작은 사물들이 그의 그림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꽃처럼 피어났다.

작은 스푼이 붙어 있는 작품 앞에 선 오세열 화백. [사진 학고재갤러리]

그는 “몇 년 전 제 작품을 보던 관람객이 눈물 흘리는 것을 우연히 봤다. 그 사람은 제 작품이 마음에 위로라고 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것인데, 그림을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지를 찾아가는 것처럼 저는 매일 무엇이 작가의 사명인지 묻고 또 물으며 작업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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