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는데 보낸 학교 요즘 이럴줄 몰랐다"

이소연 2021. 4. 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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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까지 일사천리 20세기 현장실습취업을 걱정해본 적 없다.

현장실습 중 사망한 또 다른 학생들의 유가족을 만났다.

동균이가 말 못한 21세기 현장실습첫 직장이 외식업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현장실습을 나가기 위해 빠진 만큼의 출석 일수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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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떠난 아들 동균이 신발 못버리는 아버지 김용만씨, '특성화고, 나 때와는..'
고(故) 김동균군의 아버지 김용만씨가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직업계고 현장실습 개선을 촉구했다. 박태현 쿠키뉴스 기자

취업까지 일사천리 20세기 현장실습

취업을 걱정해본 적 없다. 지난 1980년 인천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자통신 분야에 특화된 학교였다. 90% 이상의 학생들이 통신 분야로 취업했다. 3학년 2학기부터 한국통신(현 KT) 전신전화국으로 실습을 나갔다.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한 실습과 같은 일을 했다. 군 제대 후에도 어려움은 없었다. 옛 직장 대신 삼성전자를 택했다. 몇 번의 이직을 거쳤지만, 전자통신 분야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직업계고, 현장실습, 취업. 같은 길을 걷는 아들 동균이도 평탄하리라 믿었다. 처음에는 아들의 특성화고 진학을 반대했다. 동균이의 뜻은 확고했다. 성실하고 착했던 내 아들. 힘들어도 곧 적응할 것이라 여겼다. 현장실습 나간 지 6개월, 아들은 점점 야위어갔다. 몸무게는 64㎏에서 48㎏으로 줄었다.

동균이는 지난 2016년 5월7일 다니던 회사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이었다. 장례식에 온 친구들은 “동균이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눈물을 훔쳤다. 납득할 수 없었다. 죽음의 이유를 찾아야 했다. 휴대전화 기록을 떼어보고 회사를 찾아갔다. 아들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의 이유는 팔수록 선명해졌다. 현장실습 중 사망한 또 다른 학생들의 유가족을 만났다. 사연은 달랐지만 비슷했다. 특성화고에서 애견미용을 배웠던 수연이는 콜센터 업무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다 세상을 등졌다. 원예를 전공한 민호는 생수업체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졌다. 아이들의 죽음 이후 몇 차례 제도가 개선됐다. 근본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용만씨는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신발을 신고 상·하차 일을 한다.


동균이의 죽음 이후, 직업을 바꿨다. 아들이 신었던 신발을 신고 마트에서 상하차 일을 한다. 하루에 14시간씩 커다란 짐을 나른다. 고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들 생각이 나 버틸 수 없다.

동균이가 말 못한 21세기 현장실습

첫 직장이 외식업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2016년 2월 경기 군포의 한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자상거래를 전공했다. 컴퓨터를 다루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아버지는 대학에 가야 한다며 말렸지만 자신 있었다. 싱크대 물 튐 방지 장치를 고안해 실용신안을 등록했다. 방학을 반납하고 공부했다. 자격증을 5개나 취득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선생님은 경기 성남의 한 프랜차이즈 외식업체에 취업하라고 이야기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연봉이 대기업 수준”이라고 말하며 유명 요리사의 성공담을 풀어댔다. 선택지는 없었다. 그해 11월부터 외식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종일 지하에서 수프를 만들어 위층으로 날랐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뜨거운 수프를 쏟아 발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오픈·마감’ 벌칙도 괴로웠다. 근무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실수하면 한두 시간 더 일해야 했다. 퇴근이 늦어지면 집에 돌아갈 길이 없었다. 회사 라커룸에서 새우잠을 잤다. 친구들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욕먹기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괴로웠다. 현장실습을 중도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가면 반성문을 써야 했다. 선생님은 현장실습을 나가기 위해 빠진 만큼의 출석 일수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졸업까지 버텼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장이 나왔다. 지금 군대에 다녀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업체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좋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인력 공백부터 모든 일이 내 탓이 됐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이소연 쿠키뉴스 기자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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