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외교관은 왜 한국인 스님 구출 자금을 댔을까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자말>
[김선흥 기자]
- 이전기사 한영 수교 조약의 초안을 만든 사람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오늘 이동인 스님과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이동인이 영국과 수교를 서두르고 있던 1880년대 말의 상황을 개관해 봅시다. 우리 미국은 그 해 봄에 슈펠트 제독이 부산에 입항하여 조선 접촉을 시도했으나 퇴짜를 맞았습니다. 이에 청나라 측이 한미수교를 적극 주선하겠다고 나섭니다.
종주국이라고 자처하는 청나라로서는 조선이 제정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갈까 봐 심히 걱정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청나라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고삐를 죌 수 있다는 계산이었겠죠.
한편 당시 제정러시아는 청나라의 영토 일부를 이미 빼앗은데 이어 부동항을 찾아 동해 해상에 출몰하고 있었습니다. 긴장이 유발되었고 고종은 이제 더 이상 안보를 청나라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러시아의 남하에 일본 및 서양 열강도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요.
혹시 기억하세요? 스님이 만든 한영 조약 초안에 수입관세율을 10%로 한다고 되어 있음을? 이것은 놀라운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만 수교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서양국가들에게 당한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둘러씌웠습니다.
관세라는 개념도 몰랐던 조선은 일본과 관세율 제로의 협정을 체결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영국제 옥양목(주종을 차지하는 조선의 수입품)을 조선에 수출하면 그들은 많은 돈을 벌지만 조선의 재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과의 끔찍한 불평등 조약으로만도 조선 경제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동인은 그러한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지요. 이동인은 영국과 관세율 10%를 성사시키킨다면 그것을 표준으로 다른 열강과의 조약에도 적용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조선이 청나라의 올가미에 걸려들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동인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으로서, 밖으로는 청나라, 안으로는 사대주의적 수구파를 꼽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와 사대수구파의 손에 대외관계가 장악된다면 자주 독립은 물론 개화당의 입지가 크게 약화될 것을 이동인은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국 측은 이동인의 채근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케네디 주일 영국 공사대리는 이동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중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납니다. 이동인 발언의 신빙성을 재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요.
"조선인들은 어린애와 같습니다. 그들에겐 강압책을 쓰는 건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해주면 쉽게 영향을 받고 따르게 됩니다."
케네디는 이러한 정보를 긴급히 외교장관에게 보고(1880.11.22일자)하면서 자신이 몇 주 내로 조선에 나아가 조약을 체결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토우 및 아스턴과 더불어 전함 두 척의 지원을 요청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로써 이동인의 설득은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된 셈입니다.
이동인은 그 해 11월 15일부 12월 1일까지 보름간 사토우 집에서 기거하다가 조선으로 되돌아갑니다. 12월 1일자 일기에 사토우는 "아사노(이동인)가 오늘 아침밥을 먹고 나서 떠났다. 그의 마지막 아이디어는 가장 진보적인 조선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여기 일본으로 데려와 외국 대표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일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 봄 사절단이 조선을 출발할 때엔 정작 이동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동인의 의문사를 둘러싼 비사를 들춰볼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 금시초문일 겁니다. 해를 넘겨 다음해 봄이었습니다. 사토우는 고베의 아스턴으로부터 황당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동인이 실종되었다!
고베의 아스턴이 탁정식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사토우에게 전한 것입니다. 탁정식은 그즈음 아스턴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깜짝 놀란 사토우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일본 외교부를 접촉합니다. 일본 외교부에서 실종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나는 이동인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소요 액수가 허가(공사관 예산) 범위를 넘습니다. 이동인 실종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 외교부에서 확인해 주었으니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200엔이나 300엔을 낼 용의가 있습니다. 그게 도움이 된다면요."
편지를 보낸 일주일 후인 5월 3일 탁정식이 사토우를 찾아옵니다. 그날 탁정식이 전한 이동인의 근황을 사토우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동인은 배외파의 증오에 희생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살아서 숨어있을 것이다. 개화파는 내분이 심하다. 미국과의 연합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국을 적으로 여겨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이동인은 영국과의 연합을 주창한다. 그런데 자기 의견을 매우 직실적으로 토로하기 때문에 반감을 산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동인은 고종 임금이 무척 총애한다."
같은 날짜로 아스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보다 상세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탁정식은 김홍집을 통해 고종이 하사한 여권과 200량을 받았음(당시 탁정식은 대미 수교 교섭을 위한 밀사 역할을 부여 받았음)
-탁정식은 고종의 하사금 200량을 이동인측에 전해주었는데 이동인으로 하여금 그 돈으로 보호자를 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것은 탁정식의 말이며, 구체적인 사항은 언급되어 있지 않음)
-탁정식은 사토우에게 거금을 요청하지 않고 100달라를 부탁함.
-한편 아스턴은 이미 탁정식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었고 이 사실을 사토우에게 말했음. 이에 대하여 사토우는 액수를 알려주면 공사관의 케네디에게 보고하여 공금으로 변제해주겠다고 언급함.
그로부터 50일 쯤 후인 6월 22일 사토우의 일기에 의하면, 탁정식이 저녁에 사토우를 찾아와 15분 가량 머물다 훌쩍 떠났습니다. 탁정식은 이동인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면서 죽은 게 분명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토우가 5월 초에 준 200엔으로 시계를 사서 부산의 이동인 친구에게 보냈으나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을 얻을 수 없었다고 탁정식은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시계를 이용해서 구명해보려 했으나 허사였다는 뜻입니다.
다음 달 7월 12일 탁정식이 사토우를 찾아와 빌려갔던 200엔을 갚습니다. 사토우는 뜻밖이어서 저으기 놀랍니다. 사토우는 그 날짜 일기에 "나는 그에게 나와 같이 조선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나라 사람들과 상의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다시 나타날지 의심스럽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토우는 이동인을 찾으러 조선에 가려고까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동인이 나가사카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옳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실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만일 그의 목이 붙어있기만 한다면 그는 자기 나라 역사에 족적을 남길 것이 확실합니다(...he is really a very interesting man and if he can keep his head on his shoulders, pretty sure to make his mark in the history of his country."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사토우가 이동인을 매우 비범한 선구자로 여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동인의 나가사키 출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
사토우의 기록에 이동인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해를 넘겨 1882년 5월 12일자 일기입니다. "오감(吳鑑仁典)이라는 젊은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러 나에게 왔다. 일본에 2년간 머물고 있는 그는 일본어가 유창하다. …그는 어깨가 넓고 건장한 친구다. 풍모가 이동인을 많이 닮았다. 둘이는 친구였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상의 기록은 이동인의 의문사를 둘러싼 새로운 정보일 겁니다. 이동인 연구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동인은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제거되었을까요? 확인된 사실은 이동인이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1881년 3월 일본으로 떠나려고 하던 차에 사라졌다는 것 뿐입니다. 당시 그의 임무는 군함과 총기를 구입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가 살아서 뜻을 이루었다면?
해성처럼 나타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이동인의 의문사는 조선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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