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29
[이병길 기자]
1920년 4월 19일 밤 25살 청년 박재혁은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돌아왔다가 다시 8월 초순 상해로 갔다. 박재혁은 1920년 7월 상순 김기득과 박창수와 동반하여 부산진구락부에 가서 최천택에게 이 두 사람이 상해가정부원이라고 하였다. 대접비로 14, 5엔을 4명이 동행하여 동래 온천장 황정여관에서 회식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재혁은 상해가정부의 조직상황과 김원봉이 폭탄투하 단장이라고 최천택에게 밝혔다. 1920년 박재혁은 상해임정과 의열단원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재혁이 상해와 부산을 여러 차례 오고 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의열단, 제1차 국내 거사를 추진하다
의열단은 결성 이후, 1920년 대대적인 국내 거사를 준비하였다. 의열단 단원 모두가 총출동하여 "기미운동이 일어난 그 이듬해에 가장 세상을 놀라게 한 큰 사건"을 준비하였다. 국내에서 작탄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일 예정이었다.
훗날 경찰 조사를 토대로 한 거사 계획을 보면, 총계획은 단장이 김원봉이 수립하고 상해에서 지휘하고, 국내 현지 지휘자 겸 총사령관은 부단장인 김재기가 맡기로 하였다. 투탄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그리고 경성일보사로 정했다. 식민지 지배, 경제 수탈 그리고 왜곡언론의 심장부를 겨냥한 것이다. 투탄 행동대원은 곽재기, 이성우, 한봉근, 김기득(김태희), 신철휴였다. 상해와 국내의 연락 책임은 이낙준이 맡았다. 폭탄 밀반입 책임자는 이병철(李丙喆, 1887~1925, 밀양)이었다. 의열단은 국내 공작을 위해서 봉천[沈陽]에는 구영필(崔桂華)을 시켜 삼원상회를 개설·운영하고, 서간도 안동[丹東]에는 미곡상인 원보상회를 이병철이 운영하였다. 두 상회는 의열단의 연락거점으로 삼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무기 반입과 동지들의 도피, 은신처 제공, 국내 출입 안내 등의 일을 맡아 한 것이다.
의열단은 1920년 3월 중(순)에 김대지의 집에서 폭탄 3개(화약농축식, 도화선식, 투척즉발식 각 1개)를 제조하였고, 4월 초순에 폭탄 13개(7개는 도화선식, 6개는 투척식) 제조용 재료들과 미제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구입하였다. 1차로 이 폭탄을 이병철은 옥수수 가마에 넣고 포장하여 직접 밀양까지 배달하여 밀양 청년구락부장 김영환 집에 보관하고 돌아왔다. 그 폭탄은 7월 8일까지 보관되어있었다. 2차로 폭탄과 무기는 역시 같은 방법으로 포장하여 부산의 배중세가 수령하고 창원의 강상진 집에 보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폭탄과 무기류의 인수 보관자는 배중세, 관리 책임자는 이일몽(이수택)이 맡았다. 이병철의 폭탄 운반 방법은 1915년 이종암의 경북의열단 사건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국내에 들어온 의열단원 황상규・이성우・김기득(김태희)・김상윤(김옥)은 서울에, 서상락・한봉근・윤세주・신철휴는 일단 밀양에 머물렀다. 곽재기는 서울과 밀양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거사 장소가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밀양과 창원에 폭탄을 분리 보관한 것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기도경은 3월부터 의열단의 거사 계획을 탐지하고 수사를 개시하였다.
1차분 폭탄이 반입된 이후 거사를 실행할 행동대원으로 한봉근과 신철휴를 지명한 곽재기에게 그들은 시기상조라고 하였지만, 곽재기는 이수택(이일몽)에게 3주 내 결행을 김원봉이 요구한다고 알렸다. 이수택은 폭탄이 3개로 적음에 난색을 드러냈다. 당시 그는 천연두에 걸려 1개월 이상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동지도 '조급 결행'에 찬성하지 않아 거사는 연기되고 곽재기는 일단 상황을 상해의 김원봉에게 보고하고 길림으로 복귀했다.
2차 폭탄이 반입된 후 5월 13일 서울에 온 곽재기는 다시 밀양에 가서 이수택에게 폭탄 반출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결행과 동시에 뿌릴 인쇄비가 부족하다며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수택은 상경하여 동지들에게 거사 폭탄 사용을 도울 것을 언약했다. 하지만 1, 2차 거사 실행에 이수택이 폭탄 반출을 거부한 것은 비용 문제였지만 또 다른 문제는 그의 질병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종의 또 다른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거사가 실행되지 않자 6월 중순 김원봉은 이낙준에게 거사 실행 명령 서신을 보냈다. "20일 이내로 결행하고 결행자와 일시를 통지하라"는 것이었다. 6월 21일 서울 이낙준의 숙소에서 황상규, 곽재기, 김기득(김인식)은 김원봉의 지령을 받고 거사 돌입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경기도 경찰의 급습으로 6월 16일 서울에서 이성우와 윤세주(윤소룡)가 체포되었다. 동지들은 거사 결행 돌입을 결정하고, 급히 부산으로 김기득을 내려보내 이수택에게 폭탄을 받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이수택은 본인이 직접 상경하여 폭탄을 가져가겠다며 주지를 않았다. 서울로 가던 김기득은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체포되었었다. 그 후 황상규, 곽재기는 잠행하다 1개월 후 이수택을 만나 거사 실행을 타협하였다. 하지만 곽재기는 7월 5일 부산 영주동 복성여관에서 체포되고, 그 전후로 황상규, 이낙준도 검거되었다. 그리고 7월 8일 밀양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던 폭탄도 압수되었다. 경찰은 7월 29일 '밀양폭탄사건'이라며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 밀양폭탄사건 공판 -위쪽은 법정에 앉은 사건 관련 독립투사들. 사진의 중앙이 의열단 부단장인 곽재기이다. 아래쪽은 방청석의 가족들 사진이다. 출처 : 동아일보(1920.06.08.) |
ⓒ 동아일보 |
폭탄 문제를 상의하니 경찰에 넘겨주면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배중세와 윤치형에게도 이처럼 말하고 폭탄을 김태석에게 넘겨주기로 하였으나 며칠 후 경찰의 급습으로 윤치형은 체포되고 이수택과 배중세는 도피하였다. 윤치형은 부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9월 20일 김해의 강상진 집에 숨겨진 폭탄과 무기들은 압수되었다. 12월 배중세는 자수하였다. 이를 일제는 '진영사건'이라 하였다. 의열단의 제1차 거사는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 제1차 거사 사건으로 미체포된 단원은 이종암, 김상윤, 서상락 3명이다. 체포 후 풀려난 이는 한봉근, 이수택이다. 체포된 피고인들은 재판과정에서 신철휴와 윤세주는 공소사실을 대체로 부인하고, 곽재기는 대체로 시인하고 일부 부인했으며, 다른 피고들은 대체로 시인하였다. 1921년 6월 21일의 선고공판에서 '폭발물취체벌칙'과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죄목이 적용되어, 다음과 같이 형 선고가 나왔다. 곽재기·이성우 8년, 김기득·이낙준·황상규·윤소룡·신철휴 7년, 윤치형 5년, 김병환 3년, 배중세 2년, 이주현·김재수 1년(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 의열단 밀양폭탄사건 보도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중 일제를 가장 놀라게 한 사건이 밀양폭탄사건이었다. 출처:조선일보(1920.07.30.) |
ⓒ 이병길 |
박재혁, 의열단원 김기득과 임정 서기 박창수를 만나다
의열단원들이 국내에 거사를 도모하던 그 시절에 박재혁이 입국한 것은 우연일까.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 가입 제안을 받았던 당시 의열단은 국내 주요시설에 대한 투탄을 준비 중이었다. 어쩌면 김원봉은 의열단원 전체가 투입되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심장부인 서울 거사와 별도로 일본의 오사카라 불리는 부산에 별도의 부산 거사를 기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창 의열단의 거사가 진행 중인 1920년 4월 19일 밤 25살의 청년 박재혁은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돌아왔다가 다시 8월 초순 상해로 갔다. 집에 돌아온 박재혁은 자신의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 것에 놀랐다. 그가 없는 동안 주변의 친인척과 동지들이 조금씩은 생활을 도와주었겠지만, 모친과 여동생의 삶은 어려웠다.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친은 "사내대장부가 눈물은…." 하였지만, 같이 눈물을 흘렸다.
박재혁 역시 타국 생활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싱카포르, 필리핀, 중국을 돌아다닌 그에게 집은 가장 안락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들에게 타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함구했다. 무엇보다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 가입 권유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공단의 친구들이 모였다. 김인태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머물고, 왕치덕은 대구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모인 사람은 오택, 최천택, 김영주였다. 정공단의 동지들은 모처럼의 만남에 활짝 웃었다.
"박형, 외국 생활을 해서 그런지 좀 다르게 보이네."
"허허, 자네들 때깔이 더 좋네! 그려. 국내에서 독립운동한다고 고생을 했지."
"다행히 검거되지 않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지. 그래도 늘 경찰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네."
"자네들이야말로 진정 이 나라를 독립시킬 동지들이네.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이 중심으로 의열단이 결성되었다네."
"그런가. 밀양의 김원봉 그 친구? 대단하군."
"그렇다네. 정의를 열렬히 실현하기 위한 작탄 투쟁을 전개할 걸세."
"세상을 구하겠다는 구세단을 결성했던 때가 생각나네."
"그렇네! 3・1만세 운동 때 독립이 되리라 믿었는데…. 이제 진정 우리가 구세단 결성때의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야하겠어."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래야지"하며 정공단 친구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결의하였다. 조만간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모처럼 만난 친구들은 오택과 최천택, 김영주는 만세운동 이야기로, 박재혁은 타국 생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때가 바로 의열단원들이 서울 거사를 준비하고 경기도 도경은 그들을 추적하며 수사를 하는 시기였다.
박재혁은 상해에서 온 김기득과 박창수를 부산에서 6월 하순 무렵 만난다. 6월 16일 경찰 급습을 받아 이성우와 윤소룡(세주)이 체포된 이후, 뒤늦게 이를 알고 황상규・곽재기, 김기득(인식), 이낙준은 6월 21일경 정태준의 집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는 당장 거사 행동에 돌입하기로 결정하고, 곽재기는 김기득을 부산 이수택(일몽) 집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부산에 간 김기득은 이수택을 만나 요사이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는 폭탄을 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수택은 수일 후 본인이 직접 갖고 입경하겠다면서 내주지 않았다. 아마 이 시기에 박재혁과 김기득은 만난 것이다.
김기득(金奇得, 이명 : 金箕得, 金泰熙, 金永煥, 白南斗, 白永鎬, 1899~1933)은 밀양폭탄사건 재판 당시 주소가 서울이지만 실재 그는 부산 초량동 557번지 출신이다. 1919년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3월 23일 밤 종로 3정목에서 50~60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고, 독립 만세를 부른 자가 체포되었음을 알면서도 불러 정치변혁의 목적으로 경성부 각 곳에서 조선 독립시위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일제는 김기득을 안녕질서를 방해하는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하였다. 무죄 방면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길림에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이었다. 부산경찰서 투탄 이후 조사에 보면 만난 시점이 1920년 7월 상순이라 하지만, 6월일 가능성이 크다. 7월에는 이미 김기득이 체포된 이후이기 때문이다.
박창수(朴昌守, 1897년생)의 부친은 박장억(朴長億)은 밀양 관아 이방(吏房) 출신으로 갑부였다. 밀양공보 출신으로, 부산상업학교 7회 졸업생(1918)으로 박재혁의 후배이다. 졸업 후 은행에 근무하다가 1919년 4월 상순 현금 200엔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9월 2일 사이토총독의 부임에 강우규 의사가 폭탄을 던진 일과 관련하여 '한국애국단원' 명의로 일본총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투서 관련자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군산 출신 삼정물산 사원 최동호(崔東鎬, 25세)와 조선 인삼도매상인 이기동(李起東)을 만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정치의 불가함, 헌병정치의 포학(暴虐)함,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상 차별, 조선인 모별 등에 대해 피력하는 등의 언동을 하였다. 또 한윤동(韓潤東)이 소지한 <세계근사(世界近史)>를 열독하였다. 경찰 조사에 그는 증거가 불충분하여 석방되었다. 상해 임정의 내무부 서기로 1920년 3월 22일부터 6월 1일까지 근무하였다.
▲ 1926년 밀양청년회 정기총회 -밀양은 의열단의 중심지이다. 밀양청년회는 1927년 감옥에서 출소한 의열단원이 가세하여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 출처 : 시대일보(1926.05.06.) |
ⓒ 시대일보 |
김기득의 집이 초량이고 박창수가 부산상업학교 후배이기에 지연과 학연으로 박재혁과는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또 박재혁보다 둘 다 나이가 적어 자연스럽게 형, 동생 하며 지낸 사이일 수 있다. 우연히 김기득이 부산에 왔고 또 박재혁 역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기에 만남은 자연스러웠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조심스러웠다. 박재혁은 김기득과 박창수와 동반하여 부산진구락부에 가서 최천택과 만났다. 당시 부산진구락부는 좌천동 육영제 옆에 있었다.
이때 정공단 인근에 김영주도 살고 있었기에 같이 부산진구락부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 김영주는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택은 미국의원단이 온다며 서울로 가려고 할 즈음이었다. 박재혁, 최천택, 김기득, 박창수 네 사람은 부산 동래 황정(荒井)여관에 가서 회식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동행 인물은 나중에 최천택의 취조 결과이므로 실재는 김영주와 오택도 동반했을 가능성도 있다.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일본인들은 1897년 온천 개발권을 얻어 온천여관을 운영했다. 동래온천 최초의 일본인 여관인 '핫토시여관'이 개업하고, 다음에는 '광월루(光月楼)', '봉래관(蓬萊館)'이 개업 했다. 봉래관은 "조선의 파라다이스"라고 불릴 정도로 온천시설과 정원 등이 뛰어나 "동양 제일"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큰 여관이었다. 연못이 있고, 여관의 대지는 넓고 객실은 36개를 완비하였고 그중에서 6개의 방은 온돌방이었다. 1910년 11월, 부산진역에서 동래까지 약 10㎞를 잇는 경편철도가 개통되었다. 1915년 10월에는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역과 동래 사이에 전차가 연결되었다. 48분이 소요되었고 하루에 15번에서 16번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 날랐다.
▲ 1910년대 동래 황정여관 일제 강점기 부산 동래 온천은 일본인 관광을 위한 대규모 숙박시설과 음식점, 상점이 세워진 불야성의 동네가 되고 있었다. |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박형, 이미 의열단이 결성된 것을 김 단장에게 들었을 것이오. 동지도 의열단원으로 현재 진행되는 일에 관해 결단해야 할 겁니다."
"알다시피, 나에겐 모친과 어린 여동생이 있네. 눈에 늘 밟혀 결단이 힘드네."
"박형, 누구에게나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해방 투쟁에서 가족에 얽매이다 보면 누가 독립운동을 하겠습니까?"
"알겠네. 조만간 나도 결정을 하겠네. 혹시 김 단장을 만나면 결심이 서서히 되고 있다고 전해주시오."
가족과 민족해방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는 가혹하다. 그 가혹함을 넘어서는 일이 민족해방운동가에는 요구되었다. 노예의 굴종적 삶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것인가, 아니면 그 사슬을 끊어버리는 일보다는 가족의 평안을 돌볼 것인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를 파악하고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그런 과정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민족해방운동 역사 기록은 얼마나 많은가. 이름이 남겨졌다 하여도 그 여백이 너무 많은 사람이 또한 있다. 여백이 많다 하여 그 삶이 결코 빈곤한 것은 아니다. 그 이름 하나가 초석이 되어 민족해방의 돌탑은 세워졌다.
박재혁을 만나고 서울로 가던 김기득은 남대문 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박재혁을 만난 사실을 함구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7월 29일에 '밀양폭탄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였고, 박재혁은 검거의 위험을 알고 8월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국내에서 일어난 상황을 빨리 김원봉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일련의 사건에 박재혁 자신도 모종의 행동을 해야 함을 깨달았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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