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두 얼굴의 남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편집자말>
[변상철, 이희훈 기자]
▲ 2017년 11월 14일 목포 신항만에 놓인 세월호 |
ⓒ 이희훈 |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무기력에 열정을 잃어버리고, 불신 가득히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더없이 행복했던 가족은 무너졌다. 김동수씨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구한 '의인'과, 틈만 나면 자해를 하는 '꼴통'의 두 얼굴로 인식되었다.
김동수씨와의 인연은 제주에서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려고 애썼던 '기억공간 : 리본'(대표 황용운)이 조작간첩 피해자를 기억하는 공간인 '수상한집' 3층에 전시관을 열기로 하면서부터였다. 수상한집 대표인 나는 수상한집이 개관하던 2019년 6월 22일 개관을 축하하려고 찾아온 김동수씨와 처음 인사를 나눴다.
그날 개관식에서 본 세월호 생존 화물기사들의 모습은 모두 평범한 시민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개관식 날 만큼은 세월호에서 생존해 돌아온 그들에게서 어떤 분노나 절망의 빛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생존자들이 세월호의 고통에서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제주에 사는 세월호 생존자들은 일상을 살아내려고 약으로 고통과 상처를 누르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10여 알이 넘는 정신과 약으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누르고, 몇 시간이라도 잠들려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어야 하는 그들이 제주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 |
ⓒ 이희훈 |
누군가는 살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쉽게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날 참사에서 살아온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에서 살아 나온 당사자와 가족들은 세월호에서 살아온 그날부터 '지옥문'이 열렸다고 한다.
세월호에서 본 참사의 악몽에 매일 시달려야 했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뒤틀린 사회의 인식과 싸워야 했다. 트라우마와 싸우며 일터로 나가야 하는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된 후유 진단이나 치료를 받지 못한 이들은 그저 약으로 분노와 고통, 트라우마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김동수씨는 자해와 같은 방법으로 세월호 생존자의 어려운 현실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사회적 참사를 겪은 피해자다. 그러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거나 보살피는 제도가 없다. 실제로 생존 피해자들은 일 년에 몇 차례씩 신체장애 후유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로 입원해야 한다. 입원비는 전액 지원된다. 문제는 생존자들이 한번 입원하면 수 주일에서 수개월간 입원한다는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돈을 벌 수 없다 보니 가족이 어려움에 처한다. 더욱이 가족이 곁에서 간호해야 하므로 상황은 더 어렵다. 그러나 정부나 지자체는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당사자의 의료비만 지원하고 있다. 그렇게 7년간 반복된 일상으로 생존 피해자 가족 대부분은 가계 빚에 허덕이고 있다.
육지에서 떨어진 제주여서일까? 세월호 생존자가 24명이나 살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무관심에 가깝다. 김동수씨가 국회와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 자해를 한 것도 바로 무관심에 가까운 정부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살기 위해' 자해를 했던 것이다.
불규칙적인 화물운송 일이나 공사현장 일로 약속 시간 하나 잡기도 어렵다 보니 제주 생존자들은 육지에서처럼 제대로 된 모임이나 단체를 만들지 못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했던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최정규 변호사 등의 도움과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작년 처음으로 '제주세월호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 일명 '제생지'를 만들었다. 제생지를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금씩이지만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자신들의 고통과 상처를 말하기 시작했다.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 |
ⓒ 이희훈 |
김동수씨 가족은 김동수라는 사람 하나를 지키려고 가족 3명이 모두 김동수를 붙잡고 있었다.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는 지지대처럼 이들은 모두 그렇게 자신을 헌신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가족들 역시 세월호의 트라우마에 조금씩 노출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세월호의 고통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일상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 자신도 세월호 피해자처럼 외상후스트레스를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로 인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조금씩 생겨났다. 지난 7년의 시간 동안 세월호 생존자와 그의 가족은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고, 오히려 더 병들어갔다.
걷는 법을 잊지 않았으면
지난 7년을 살아오며 이들은 일상을 사는 법을 잊을까 두려워했다. 이들의 두려움에 원인을 제공했던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대답도 없다. 그래서 세월호 생존자 가족 이야기, <세월호 의인과 꼴통, 김동수 가족 이야기>를 쓴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탑승하지 않았던 가족들도 고통 받고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품고 돌봐야 하는지 고민해 봤으면 한다.
누구라도 세월호 피해자가 될 수 있었고, 누구라도 세월호 피해자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적 참사에 대한 긴장과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삼풍백화점에서 대구지하철로 그리고 다시 세월호로 이어지는 이 사회적 참사의 고리를 끊는 길을 세월호 생존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에서 찾았으면 한다.
▲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와 가족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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