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교비가 들려주는 법주사와 순조 태실

김희태 2021. 4. 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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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기자]

충북 보은에 있는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벽암대사비와와 봉교비(奉敎碑)다.

이 가운데 봉교비를 주목해야 하는데, 별도의 안내문이 없기에 법주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비석이다. 하지만 봉교비는 법주사와 순조 태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법주사 봉교비(奉敎碑) 봉교금유객제잡역/함풍원년삼월일입/비변사(奉敎禁遊客除雜役/咸豊元年三月日立/備邊司)이 새겨져 있다.
ⓒ 김희태
 
해당 비석의 전면에는 '봉교/금유객제잡역/함풍원년삼월일입/비변사(奉敎/禁遊客除雜役/咸豊元年三月日立/備邊司)'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봉교(奉敎)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든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법주사(法住寺) 봉교비를 통해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했음을 알 수 있다.
ⓒ 김희태
 
봉교비의 명문을 통해 함풍 원년인 1851년(철종 2) 3월에 세워진 사실과 당시의 중앙 관청인 비변사(備邊司)의 주도로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사회였기에 이러한 봉교비를 세웠다는 건 법주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법주사에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 있는데, 사도세자(1735~1762, 추존 장조)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과 순조 태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이 가운데 봉교비는 순조 태실과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봉교비와 순조 태실, 속리산에 남아 있는 태실 흔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 중인 '순종태봉도'라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순조의 태실을 중심으로 법주사와 문장대, 속리산의 지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법주사에 남아 있는 순조의 태실 흔적은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의 반대편에 있는 하마비와 화소 표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법주사 하마비(下馬碑)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경우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다.
ⓒ 김희태
 
하마비(下馬碑)란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로, 보통은 궁궐, 향교, 서원 등 유교적 건축물에 세워졌다.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사례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다. 가령 남양주 봉선사의 경우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능)의 원찰로, 영천 은행사와 보은 법주사의 경우 각각 인종과 순조의 태실이 있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다.
 
▲ 화소(火巢) 하마비의 후면에 새겨져 있다.
ⓒ 김희태
 
또한 하마비의 후면에서 화소(火巢)가 새겨져 있는데, 화소란 능이나 태실을 조성할 때 불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따라서 화소 구간 내에는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했다. 이처럼 하마비와 화소의 존재는 순조의 태실과 연결이 된다. 

봉교비의 내용 중 노는 행위를 금지한 것은 당시의 산수유람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은 산수(山水)를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곤 했는데, 남몽뢰(南夢賚)가 속리산을 다녀온 뒤 남긴 <유속리산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옥이 쓴 <중흥유기>에는 이옥의 일행이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이틀간 밥을 먹고 머문 곳이 태고사(太古寺)와 진국사(鎭國寺)였다. 따라서 봉교비에 언급된 노는 행위의 금지는 법주사가 있는 일대는 순조의 태실이 있는 곳이니,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노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 것 역시 법주사가 태실의 수호사찰이기 때문이다. 실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경우 승첩을 내려주거나 잡역(雜役)을 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실제 <일성록>에는 예천 용문사에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한 뒤 승려들이 태실을 수호하기에 잡역에 동원되면 용문사의 지탱이 어렵고, 태실 수호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로 잡역을 면해주는 내용이 있다.
 
▲ 보은 순조 태실 가봉비와 장태 석물이 잘 남아 있다.
ⓒ 김희태
한편 순조의 태실은 세심정 분기점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이정표에서 300m 가량 올라가면 순조 태실을 만날 수 있는데, 가봉비와 장태 석물이 잘 남아 있다.
가봉비의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가경십일년십월십이일건(嘉慶十一年十月十二日建)'이 새겨져 있다. 가경 11년은 1806년(순조 6)으로, 순조의 재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순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 금표(禁標) 후면에 서(西)가 새겨져 있으며, 세심정 분기점에 못 미쳐 만날 수 있다.
ⓒ 김희태
 
또한 세심정 분기점에 못 미쳐 순조 태실과 관련이 있는 금표가 남아 있다. 해당 금표의 전면에 '금표(禁標)'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서(西)'가 새겨져 있다. 금표는 태실이 조성되면 신분에 따라 거리를 측량해 사방의 경계에 금표를 세웠는데, 해당 금표는 이와 관련이 있는 흔적이다. 

이처럼 봉교비를 통해 조선 시대에 사찰의 지위와 선비들의 산수유람, 그리고 순조 태실과 관련한 흔적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다만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안내문이나 관련 정보를 알 수가 없기에 대부분 봉교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부분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기에 봉교비와 하마비, 화소, 금표 등에 대한 안내문의 설치와 그 안에 순조 태실과의 연관성을 함께 넣어줄 필요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앞으로 속리산과 법주사를 찾으실 때 봉교비와 순조 태실의 흔적을 찾아본다면 그때 보이는 속리산과 법주사의 모습은 분명 이전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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