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교비가 들려주는 법주사와 순조 태실
[김희태 기자]
충북 보은에 있는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벽암대사비와와 봉교비(奉敎碑)다.
▲ 법주사 봉교비(奉敎碑) 봉교금유객제잡역/함풍원년삼월일입/비변사(奉敎禁遊客除雜役/咸豊元年三月日立/備邊司)이 새겨져 있다. |
ⓒ 김희태 |
해당 비석의 전면에는 '봉교/금유객제잡역/함풍원년삼월일입/비변사(奉敎/禁遊客除雜役/咸豊元年三月日立/備邊司)'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봉교(奉敎)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든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법주사(法住寺) 봉교비를 통해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했음을 알 수 있다. |
ⓒ 김희태 |
봉교비의 명문을 통해 함풍 원년인 1851년(철종 2) 3월에 세워진 사실과 당시의 중앙 관청인 비변사(備邊司)의 주도로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사회였기에 이러한 봉교비를 세웠다는 건 법주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법주사에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 있는데, 사도세자(1735~1762, 추존 장조)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과 순조 태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이 가운데 봉교비는 순조 태실과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봉교비와 순조 태실, 속리산에 남아 있는 태실 흔적
▲ 법주사 하마비(下馬碑)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경우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다. |
ⓒ 김희태 |
하마비(下馬碑)란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로, 보통은 궁궐, 향교, 서원 등 유교적 건축물에 세워졌다.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사례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다. 가령 남양주 봉선사의 경우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능)의 원찰로, 영천 은행사와 보은 법주사의 경우 각각 인종과 순조의 태실이 있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다.
▲ 화소(火巢) 하마비의 후면에 새겨져 있다. |
ⓒ 김희태 |
또한 하마비의 후면에서 화소(火巢)가 새겨져 있는데, 화소란 능이나 태실을 조성할 때 불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따라서 화소 구간 내에는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했다. 이처럼 하마비와 화소의 존재는 순조의 태실과 연결이 된다.
봉교비의 내용 중 노는 행위를 금지한 것은 당시의 산수유람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은 산수(山水)를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곤 했는데, 남몽뢰(南夢賚)가 속리산을 다녀온 뒤 남긴 <유속리산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옥이 쓴 <중흥유기>에는 이옥의 일행이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이틀간 밥을 먹고 머문 곳이 태고사(太古寺)와 진국사(鎭國寺)였다. 따라서 봉교비에 언급된 노는 행위의 금지는 법주사가 있는 일대는 순조의 태실이 있는 곳이니,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노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보은 순조 태실 가봉비와 장태 석물이 잘 남아 있다. |
ⓒ 김희태 |
▲ 금표(禁標) 후면에 서(西)가 새겨져 있으며, 세심정 분기점에 못 미쳐 만날 수 있다. |
ⓒ 김희태 |
또한 세심정 분기점에 못 미쳐 순조 태실과 관련이 있는 금표가 남아 있다. 해당 금표의 전면에 '금표(禁標)'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서(西)'가 새겨져 있다. 금표는 태실이 조성되면 신분에 따라 거리를 측량해 사방의 경계에 금표를 세웠는데, 해당 금표는 이와 관련이 있는 흔적이다.
이처럼 봉교비를 통해 조선 시대에 사찰의 지위와 선비들의 산수유람, 그리고 순조 태실과 관련한 흔적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다만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안내문이나 관련 정보를 알 수가 없기에 대부분 봉교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부분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기에 봉교비와 하마비, 화소, 금표 등에 대한 안내문의 설치와 그 안에 순조 태실과의 연관성을 함께 넣어줄 필요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앞으로 속리산과 법주사를 찾으실 때 봉교비와 순조 태실의 흔적을 찾아본다면 그때 보이는 속리산과 법주사의 모습은 분명 이전과 다를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유령수술 방어' 유상범에게 수천 만 원 준 나는 바보였다
- 정경심 측 "검찰 USB끼워 동양대 PC 증거 오염"...검 "포렌식 작업"
- '미얀마 투데이' 만든 MZ세대 부부 "한국 지지 큰 도움"
- 봉사활동 고민인 분들, 현직 교사가 알려주는 꿀팁
- "미국도 중국도 강요 않는데, 언론이 미국편을 강요"
- "10대들이 '아침마당' 타이틀송 듣고 놀라는 이유는..."
- 제 아들 동희가 응급실 수용거부로 죽었습니다
- 6.25 전후 적 지역에서 비정규전 수행한 공로자, 명예회복 길 열려
- 오세훈 "상생방역으로 민생·방역 모두 지킬 것" [오뜨말]
- 미, 정 총리 '동결자금 이란돈' 발언에 "미 이란제재입장 안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