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엄마에게.. 약속을 잊지 말아주세요

김지영 2021. 4. 12. 07: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이비박스 심층리포트 ③] 베이비박스 아이를 입양한 장재순씨 이야기

이 기사는 베이비박스 아이를 입양한 장재순(55)씨 사연을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기자말>

[김지영 기자]

 지수 생모가 베이비박스에 함께 남긴 편지. 아이에 대한 생모의 사랑이 절절하게 읽힌다.
ⓒ 장재순
 
나중에라도… 우리아기를 꼭 찾아서… 엄마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직접 얘기해 주고 싶구나… 우리아가… 참 이쁘고… 건강히 태어났는데… 엄마 곁을 떠나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생년월일 2016. 6. 9. 12시 6분.

고생이 엄마 보세요.

고생이가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날 남긴 두 장의 편지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뒤쫓아 온 직원을 만나 상담을 하고 간다는데 고생이 엄마는 금방 사라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해요.

고생이가 고생이인 이유가 편지에 쓰여 있었어요. 뱃속에 있던 열 달 동안 고생만 시킨 것 같아 혼자 속으로 고생아 고생아 해서 고생이라고 목사님께 남긴 편지에 쓰셨어요. 그 고생이가 제게 와서 지수가 되었네요. 

네. 저는 고생이 엄마가 낳은 딸 지수 엄마예요. 편지에 썼던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고,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었던 사연은 묻지 않을게요. 지수를 베이비박스에 내려놓고 금방 사라져야 할 만큼의 어떤 절박한 사연이겠지요.

유난히 마음이 가는 아이
 
 지수가 보육원에 처음 올 때부터 키웠던 인연이 가족으로 이어졌다.
ⓒ 장재순
제가 지수를 처음 만난 건 지수가 태어난 지 한 달에서 열흘이 지난 2016년 7월 19일 화요일이었어요. 그때 저는 나이가 오십인 보육원 생활지도원이었습니다. 베이비박스에서 일시보호시설을 거쳐 지수가 우리 보육원에 온 그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생활지도원으로 일한 지 5개월 남짓 지나고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따서 일을 했지만 사실 체질에는 맞지 않았어요. 지금은 공무원인 아들과 딸이 그땐 대학생이었지요. 일을 다시 하고 싶었고 아는 언니 권유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보육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경찰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노후를 대비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배정받은 방이 신생아부터 돌 전 아이들까지 14명이 있는 방이었어요. 3명의 교사가 한 팀이 되어 24시간 맞교대로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나이 오십에 혼자 네다섯 명 아이를 먹이고, 기저귀 갈고, 놀아주고, 목욕시키고, 재우는 일을 반복하다 집에 들어가면 절로 다리가 풀릴 정도로 힘들었죠.

무뚝뚝하지만 가정적인 남편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다 키워 놓고 비어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기가 싫었어요. 몸은 힘들지만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이 내 사랑으로 자라는 모습을 보는 건 공인중개사 일에 비할 수 없었죠. 

지수는 올 때부터 제 담당이었어요. 태어난 지 한 달 보름이 되어가는 꼬물꼬물한 아이를 제가 안았죠. 자식 둘을 키울 때도 사실은 다 똑같지 않았어요.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미운 구석 예쁜 구석이 따로 있었죠. 보육원에서 여러 명의 아이를 한꺼번에 보지만 유난히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아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약함이겠지요.

지수가 제겐 그런 아이였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지수는 한 번 방긋 웃어주는 습관이 있었어요. 그런 지수를 볼 때면 납처럼 무거웠던 몸이 구름처럼 가벼워지곤 했지요. 지수는 천성이 웃는 아이였고 선한 아이였습니다.
 
 지수 생모가 베이비박스 목사님께 따로 남긴 편지. 지수를 고생이라 부른 안타까운 이유가 적혀 있다. 지수 생모가 지수를 위해 남긴 흔적은 두개의 편지가 유일하다.
ⓒ 장재순
시설에서 자라면서 아이들은

그런 지수를 저는 유난히 좋아했고 지수도 그런 제 마음을 알았는지 유난히 따랐습니다. 24시간 함께 지내다 교대 시간이 되어 보육원을 나서야 할 때면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 보채는 지수 때문에 매번 마음이 무너지곤 했지요.  

그렇게 17개월을 키웠습니다. 계절이 여섯 번 지나가는 동안이지만 지수에겐 평생이었지요. 저는 지수 바로 옆방으로 옮겨 다른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언제든 볼 수는 있었지만 제 손안에서 자란 아이를 놓아야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공무원으로 취업한 딸에게 지수 후원을 부탁했습니다.

한 달에 하루 지수를 데리고 외출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건 딸의 후원 덕이었지요. 그날만큼은 지수를 온전히 예뻐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데리고 나와서 저녁에 다시 데려다주어야 했지만 남편도 아들도 딸도 모두 지수를 좋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들과 지수는 요즘 말로 케미가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요. 특히 더 서로를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지요. 아들에게는 딸 같은 동생이었고 지수에게는 아빠 같은 오빠가 되었지요.

하지만 태어나 한 달 조금 넘어서부터 지수를 키워 온 저에게는 지수를 향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었습니다. 그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바뀌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지요. 사실 정기적으로 외출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입양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겐 다 큰 아이들이 둘이나 있었고 남편은 곧 퇴직을 앞둔 나이였고요. 저는 저대로 갱년기를 지나는 초로의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은퇴할 나이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이에겐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었죠.

어느덧 시간이 흘러 2018년이 되었고 지수가 4살이던 때였습니다. 저는 변함없이 지수가 있는 보육원으로 출근했고 지수는 그 안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시설 환경이 좋아지고 성품 좋은 선생님들만 있어도 단체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엄마·아빠 없는 설움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열이 40도가 올라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참아내면서 노는 8살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지 짐작이 되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규격에 맞는 요구가 아니면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의 특성에 맞는 보육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 시설이 가진 한계입니다.

이 한계가 자기 개성을 앗아가고 아이는 매번 자기만의 고유의 욕망이 현실에서 거절당하는 습관이 생기는 거지요. 그러니 아프면 말해서 고쳐야 한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요구까지도 참아내게 되는 거였습니다. 오로지 자기만 바라보는 가족이 있고 자기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는 가정이 필요한 건 어쩌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의 권리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치원에 갔다 온 아이를 샤워시키는데 저한테 와서 이 아이가 묻습니다. '이모, 혼자 사는 게 좋아요, 같이 사는 게 좋아요? 나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는데 누구한테 가서 엄마를 빌리고 아빠를 빌려야 돼요?' 축 처진 어깨로 질문을 하는 아이를 차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제가 지수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가지는 아픔을 이해하게 되면서 가진 저만의 욕망이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아이를 다 구할 수는 없지만, 유난히 마음이 갔던 지수에 대한 안타까움 말입니다.

약속
  
 지수의 성장기. 베이비박스에서 보육원을 거쳐 여섯 살 지수가 될 때까지. 지수는 천성이 밝고 순한 아이였다.
ⓒ 장재순
 
그래서 그랬는지 4살이 된 지수에게 어느 날 엄마·아빠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덜컥 해버렸습니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습니다. 저는 입양하기엔 모든 게 늦은 환경이었지만, 제겐 결혼하고 오십이 가까워지도록 자식이 없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거든요. 여동생이 마음만 먹으면 입양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생기지 않은 자식에 대한 열망이 컸던 여동생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곧 입양 절차가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모든 건 다 충족이 되었는데 동생에게 건강 이상이 발견되었고 입양이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난감하고 황망했습니다. 자식처럼 키웠고 자식처럼 내 손에서 자라 준 지수에게 한 약속이었는데 갑자기 지키지 못할 사정이 생겨버렸습니다.  

하지만 '지수야, 이모가 너한테 엄마·아빠를 만들어줄게'라고 했던 약속을 마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입양으로 인해 지수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저는 약속이 무산되면서 상실될 지수의 세상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약속을 책임지는 건 곧 지수의 삶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16년 7월 19일. 꼬물꼬물한 아기로 제 품에 날아든 지수를 처음 보았던 그 날 이후 지수가 유난히 제게 밟혔던 이유가 결국 이런 운명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 입양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지수를 한 달에 한 번 외출해서 만나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과 그런 지수를 제 평생의 삶을 나누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깊은 고민에 빠졌고 저는 기다렸습니다. 반대가 있었지만 지수가 싫어서 하는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너무 어린 자식과 혹은 동생에 대한 책임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설득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나이 많은 우리 부부가 지수를 입양한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매우 깊은 고민의 결과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수가 우리에게 와서 가족이 된 처음은 바로 고생이 엄마로부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무척 고생스러운 과정을 똑같이 밟은 셈입니다. 그 과정을 이겨내고 고생이 엄마는 낳았고 저는 입양을 했으니까요. 

변화

우리 가족이 지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2019년 6월이었습니다. 지수가 4살이었죠. 입양 절차를 거쳐 법원 판사님으로부터 최종 결정을 받은 날은 2020년 1월 31일입니다. 지수의 세상이 우리 안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을 또 지나고 있네요.

그동안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수 입양이 확정되고 바로 보육원을 그만두었습니다. 제 노후 준비에 대한 욕망 따위 지수를 온전하게 잘 키우고 싶은 욕망에 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나이가 50대 중반이 되었고, 지수는 6살이 되었습니다.

지수는 제 욕심을 감추지 않는 공주병 아이로 변했고, 죽이 잘 맞았던 오빠는 지수가 말하는 걸 죄다 들어주는 지수가 가장 사랑하는 오빠가 되었습니다. 60에서 세 살이 모자라게 나이 먹은 아빠는 지수가 사달라는 걸 사주지 못해서 안달인 가장 만만한 아빠가 되었고, 직장이 멀어 관사에서 생활하는 언니를 오빠만큼 사랑하진 않지만 지수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모든 돈을 다 대주겠다는 든든한 언니가 되었습니다.
  
 지수네 가족사진. 과묵하지만 가정적인 아빠. 세상에서 지수가 가장 사랑하는 오빠. 시크하지만 지수의 든든한 뒷배인 언니. 보육원에선 이모였던 지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
ⓒ 장재순
고생이 엄마. 이렇게 지수와 지수를 둘러싼 환경은 다 좋아졌는데 여전히 지수에게는 아물지 않는 아픔이 있습니다. 보육원에서 4살까지 자라다 제 딸이 되면서 가정에서 자라기 시작한 지수는 입양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이젠 엄마라고 불리는 제가 자신을 낳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깨우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느 날 제가 아들에게 '우리 아들'이라고 했다고 지수가 펑펑 소리 내 울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엄마가 낳은 딸이 아니라는 생각에 갑자기 서러워졌던 것입니다. 그럴 때는 또 제 마음도 무너집니다.

지수에게 배로 낳는 거나 가슴으로 낳는 거나 다 똑같다. 똑같은 내 딸이고 죽을 때까지 내 딸이라고 몇 번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배로 낳은 엄마는 이쁜언니엄마라고 얘기해줬어요. 그 말 때문에 어느 날부터 지수에게 고생이 엄마는 '이쁜언니엄마'가 되었는데요. 한 날 또 지수가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 이쁜언니엄마가 내 동생을 낳아줬을까?" 제게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지수에게는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자신을 낳아 준 엄마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늙은 엄마의 두번째 약속 : 이쁜언니엄마

고생이 엄마. 아니 어딘가에서 혹시 이 편지를 보고 있을 우리 이쁜언니엄마. 어쩌면 저보다 스무 살 혹은 서른 살이 어릴지도 모를 젊은 이쁜언니엄마. 이 늙은 지수 엄마가 부탁이 있어요. 베이비박스에 지수를 내려놓을 때 직접 써서 함께 놓은 편지에 적힌 약속을 기억해주었으면 해요.

지수가 어느 날 제 명치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나 이쁜언니엄마를 생각하면 여기가 찌릿찌릿 너무 아파.'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명치 끝도 아려오면서 지수에게 이쁜언니엄마를 꼭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수가 이렇게 제 깊은 속말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잘 자라고 있는데 그걸 고생이 엄마랑 이젠 같이 봐도 되겠다 싶었어요. 

'이쁜언니엄마도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되'겠냐는 지수의 말은 이제 제가 엄마 아빠를 만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에 이어 지수에게 한, 반드시 지키고 싶은 두 번째 약속입니다. 그게 지수의 삶을 더욱 당당하고 깊고 풍요롭게 할 거라고 이 늙은 엄마는 생각합니다.

우리 예쁜 지수를 낳은 이쁜언니엄마. 지수가 '고생이'었을 때 한 약속을 잊지 말고 언제가 되든 나와 같은 지수 엄마로 다시 올 수 있는 그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기 마지막으로 그 약속을 새로 적어봅니다.
 
나중에라도… 우리아기를 꼭 찾아서… 엄마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직접 얘기해 주고 싶구나.

이쁜언니엄마. 고생이, 아니 지수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지수는 건강하고 밝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지수 마음 속에 생모에 대한 그리움은 깊게 자리하고 있다.
ⓒ 장재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