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13세 때 영국 여왕이 반한 남자 '73년 외조의 왕' 작별인사
영국 여왕 묵묵히 외조, 74년간 해로
엄격한 아버지, 자상한 시아버지
다이애너 "가장 사랑한 아빠" 불러
“아버님, 제 가정불화를 해결하고자 기울여주신 놀라운 노력에 제가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영국의 고 다이애너 왕세자빈이 1992년 시아버지 필립 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이 친필 편지에서 다이애너는 시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로 불렀다.
이 일화의 주인공이자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이 지난 9일 별세했다. 만 99세. 영국 매체가 필립 공의 일생을 추모할 때 빼놓지 않는 단어가 책임감과 규율이다. 필립이 평생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삶을 지탱해준 것이 이 두 가지였다.
필립 공은 증조부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 국왕,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가 그리스 왕국(1974년 폐지)의 국왕인 덴마크·그리스 왕족 출신이다. 왕실의 먼 친척으로서 영국에서 교육받고 해군 장교로 임관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47년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며 52년 부인이 즉위하면서 여왕 부군이 됐다. 가정에서 그는 때로 까칠한 남편이었으며 엄격한 아버지였고, 이혼 위기의 며느리를 다독거렸던 자상한 시아버지였다. 가족 관계 속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본다.
왕실 혈통에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외모를 갖춘 그는 젊은 시절 가는 곳마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를 눈여겨 본 사람 중에는 훗날 영국의 군주가 되는 엘리자베스도 있었다.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엘리자베스가 감성과 열정을 앞세워 다가간 드문 존재가 남편 필립이다. 13살 때 다섯 살 많은 필립을 본 뒤 사랑에 빠졌고 그 뒤 편지를 주고받다가 47년 결혼했다.
왕의 남자가 될 줄 알고 한 결혼이었지만 처음엔 평탄하지 않았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으며 다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생활은 줄타기의 연속이었다. 결혼 초 필립 공의 외도설이 그치지 않았다. 결혼 10년째인 57년엔 엘리자베스 2세 없이 해군 요트를 타고 호주와 남극 순방에 나섰다. 군주 부부의 불화설은 영국뿐 아니라 영연방의 단골 화제가 됐다.
필립 공은 이런 방황을 거쳐 결국 자신의 가치인 책임과 규율로 돌아왔다. 부부는 74년을 해로했다. 97년 결혼 50주년 행사에서 필립 공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적인 결혼의 열쇠는 서로에 대한 아량입니다.”
찰스 왕세자는 부친인 필립 공의 서거를 두고 BBC에 “어머니를 오래도록 보필한 그분의 에너지는 진정 놀라웠다”며 “여왕의 생애에서 그는 바위 같은 든든한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찰스 왕세자지만 “그립다”는 말도 했다.
사실 필립 공과 찰스 왕세자의 관계도 매끈하진 않았다. 찰스 왕세자는 부드러운 성격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졌는데, 군인 출신의 필립 공은 이는 단호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갈등은 찰스 왕세자의 진학을 둘러싸고 최고조에 이르렀다. 찰스는 윈저 성에 가까운 이튼 칼리지를 원했지만, 필립 공은 자신의 모교인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 기숙학교를 고집했다. 엄격한 규율과 스포츠로 심신 수양을 추구하는 학교다. 찰스 왕세자는 “많은 것을 배웠다”며 무사히 졸업했지만, 자신의 두 아들은 가까운 이튼 칼리지에 보냈다.
왕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일까. 필립 공은 유독 왕실의 며느리나 사위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가장 각별했던 경우가 만 20세의 나이에 32세였던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다이애너 빈이었다. 필립 공과 다이애너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시아버지는 결혼생활을 힘들어하는 며느리를 다독이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 다이애너의 장례식 때는 손주인 윌리엄과 해리가 엄마의 관을 따를 수 있도록 했고, 자신도 함께했다.
BBC에 따르면 필립 공의 장례식은 오는 17일 왕실 거처인 런던 서쪽 윈저 성의 성조지 예배당에서 국장이 아닌 왕실장으로 열린다.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해 30명 이하의 왕족만 참석할 예정이다. 미국에 사는 손자 해리 왕자는 참석하지만, 그의 부인 메건 마클은 임신에 따른 건강 문제로 오지 않는다. 보리스 존슨 총리도 참석하지 않고 다른 왕족에게 자리를 내주기로 했다. 간소한 장례식은 필립 공의 유언이기도 하다.
전수진·정은혜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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