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의사가 환자 찾아간다..재택임종 돌봐줄 왕진 의사

백만기 2021. 4.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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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3)
말기 환자를 대하는 시각에는 두 부류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병원의 의료 장비를 이용하여 가능하면 환자의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려는 견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있듯 환자의 생명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의사다. 다른 하나는 환자에게 고통만 주는 치료를 지속하기보다 환자가 삶의 마무리를 잘할 수 있도록 돌봄에 집중하려는 견해. 대부분 호스피스 완화의료 의사가 그러하며 임상에서도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의사도 있다.

환자도 두 부류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신약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주었으면 하는 환자. 이들은 생명만 연장할 수 있으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한다. 가족들 역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죄의식과 의무감에 환자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하기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환자. 스위스에서는 이런 사람을 위하여 안락사를 용인하고 있다.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치료에 집착하기보다 돌봄에 치중하는 의사와 이제는 치료를 중단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가 만난다면 좋은 매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환자의 생명을 어떻게 해서든지 연장하려는 의사와 신약을 써서라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환자가 만난다면 치료결과와 죽음의 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런 관계도 둘 다 원하는 매칭이라 할 수 있다.

환자의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려는 의사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관계, 또는 그 반대의 경우에는 과연 누구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까? [사진 unsplash]


문제는 의사와 환자가 원하는 바가 다른 경우다. 즉 환자의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려는 의사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관계, 또는 그 반대의 경우다. 이럴 때는 과연 누구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까? 어떠한 경우라도 당연히 환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병원에 입원하면 환자의 소원보다는 의사의 권위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일본 의사는 집안의 어르신이 노환으로 운신하기 어려울 때 앰뷸런스를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인이 들려준 얘기다. 일전에 무릎 수술을 받았던 80대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이웃에게 부탁해 어머니를 급히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던 중 그의 어머니가 말기 암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인은 항암치료에 집중하다가 퇴원하지 못하고 두 달 후 중환자실에서 운명했다. 지인은 당시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같은 기간을 살았더라도 고통은 덜 받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회한에 젖어있다.

예전에는 노인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비가역적인 상황에 들어서면 의사가 가족에게 퇴원을 권했다. 병사도 객사로 인정해 될 수 있으면 집에서 가족들과 임종을 맞이했으면 하는 배려에서다. 그러나 요즘은 암 환자의 경우 90% 이상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당사자인 환자는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왜 병원에서 숨져야 할까? 병원에서는 말기 환자를 치료함으로 얻는 수입이 전체 수입의 20%에 달할 정도로 크다. 게다가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심적 갈등을 덜어준다. 아파트 문화의 보급으로 가족이 핵가족화해 환자를 돌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 와중에 고통을 겪는 것은 오로지 환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설사 환자나 가족이 재택 임종을 원해도 현행제도로는 집에서 숨지는 것도 녹록하지 않다. 집에서 사망할 경우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없으면 경찰이 개입하기 쉽다. 더구나 생명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을 때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혹시 타살의 개연성은 없는지 가족을 상대로 심문하기도 하고 사인을 밝히기 위해 시신을 부검할 때도 있다. 가족으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부모의 죽음으로 슬픈 가운데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누가 재택 임종을 선호할 것인가. 환자는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도 가족이 걱정되어 그 마음을 감추고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람도 있다.

생활 속에서 미리 대처하는 법은 없을까. 아직 시행 초기이지만 있긴 있다. 의사를 집으로 초빙하는 왕진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동네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왕진이 흔히 있었다. 그러나 의료 장비가 현대화되고 의료보험이 도입되면서 왕진제도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물론 의사도 가정을 방문해 환자를 진료하고 싶으나 왕진 보수가 너무 낮아 그러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2019년 정부에서 건강보험법 시행규칙에 ‘질병·부상·출산 등으로 거동이 불편해 방문요양급여가 필요한 경우’라는 근거 조항을 담아 왕진 보수를 현실화했다.

왕진 의료기관은 동네 의원으로 한정한다. 환자의 나이나 질환에 제한이 없다. 의사가 거동이 불편해 왕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환자가 대상이다. 환자 1명을 왕진하는 데 보통 1~2시간 걸린다. 왕진하는 동네 의사에게는 건강보험공단이 환자 진찰료, 왕진에 따른 이동 시간과 기회비용 등을 고려해 왕진 1회당 8만~11만 5000원의 수가를 산정해 지급한다. 환자는 왕진료의 30%만 부담하면 된다.

환자가 진료 중 사망하면 왕진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발급할 수 있다. 다만 현행 의료법 제17조에는 진료 중인 환자가 최종 진료 시점부터 48시간 이내에 사망한 경우에 다시 진료하지 아니하더라도 진단서나 증명서를 내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틀에 한 번씩 의사의 왕진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노인의 임종을 짐작하기란 사실상 일반인은 어렵다. 그러므로 노인환자는 시간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한 달에 몇 번으로 횟수를 적용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의사도 생활인이라 무조건 희생만 강요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수입과 명분만 살려줄 수 있다면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한 진료보다 환자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진료를 선호하지 않을까. [사진 pixabay]


현재 왕진 시범사업에 참여한 동네 의원은 전국에 348개가 있다.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일차의료 왕진수가 청구현황’을 공개했다. 왕진 시범사업을 시작한 2019년 12월 27일부터 지난해 10월 31일까지 약 10개월간 시범사업 대상기관 가운데 실제 청구가 이뤄진 기관은 104곳에 불과했다. 건강보험 수가 청구 환자도 1163명으로 기관당 11.2명에 그쳤다. 원인을 찾는다면 정부의 홍보가 부족했고 의원의 소극적인 자세도 있다.

의사 단체는 정부에서 책정한 왕진 수가가 너무 낮다며 수가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왕진을 나가는 의사도 있다. 지난해 숨진 상계동 은명의원 김경희 원장은 노환으로 병원문을 닫기까지 홀몸 노인을 위해 20년 가까이 무료 왕진을 다녔다. 노원구 중계동의 파티마 의원 장현재 원장도 한 달에 두세 차례 왕진 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간다. 그는 수가와 무관하게 환자를 돌본다.

지역민과 더불어 비영리 의료협동조합을 결성한 의사도 있다. 2012년 은평구에 살림의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추혜인 원장이다. 설립 초기에는 조합원 348명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3200명이 넘는 조합으로 성장했다. 그는 매주 수요일 왕진 진료만 다닌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추 원장을 포함해 가정의학과 전문의 2명, 산부인과 전문의 1명, 정신과 전문의 1명이 진료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는 이웃이 건강하기를 원할까, 아프기를 원할까. 당연히 건강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웃이 모두 건강하다면 의사도 생활인인데 병원을 운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많은 병원과 의원이 하지 않아도 될 치료와 검사를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료협동조합은 환자 수에 상관없이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으므로 환자의 건강에 더 초점을 맞춰 진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의사나 환자나 모두 만족도가 높은 것은 물론이다.

얼마 전 동네 의원을 진료차 방문한 적이 있다. 진료를 마치고 의사에게 왕진 시범사업이 활성화하기 위하여 어떤 전제가 필요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의료 단체에서 주장하듯 수가를 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왕진 사업에 참여할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도 생활인이라 무조건 희생만 강요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수입과 명분만 살려줄 수 있다면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한 진료보다 환자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진료를 선호하지 않을까.

보건복지부는 2019년에 이어 지난달 30일부터 4월 12일까지 왕진 수가 시범사업 2차 공모에 참여할 의료기관을 모집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점차 왕진 수가 시범사업이 활성화하면 서울 시내 5개 대형 병원으로 쏠리는 환자편중 현상도 해소할 수 있고 사망진단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임종 환자의 마음의 짐도 어느 정도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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