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적에게 작은 손 내밀어.. 달란트 결실"
어린시절 파라과이로 이민.. 극심한 인종차별에 고통
1976년 온 가족과 중남미 파라과이에 이민 온 열세 살 사춘기 소년은 집 밖에 나가는 일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소년은 가족이 정착한 수도 아순시온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치노’(스페인어로 중국인)라고 부르며 눈을 찢는 시늉을 하는 행인들을 수없이 봐야만 했다. 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물벼락을 맞거나, 누군가 던진 돌에 맞는 경우도 있었다.
동양인을 무시하는 행동에 소년은 현지인은 물론 파라과이와 관련된 모든 게 싫어졌다. 한국의 전 재산을 판 밑천으로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이 점차 기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변 이민 가정에 보증을 서 빚까지 떠안자 소년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소년은 주저앉지 않았다. 악착같이 공부해 이스라엘과 미국 유학을 거쳐 라티노 선교에 앞장서는 신학교수로 성장했다. 중남미 각국을 초청 방문해 현지 신학생과 목회자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파라과이에서 설움을 받으며 익힌 스페인어가 라티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도구가 됐다.
소년은 바로 미국 고든콘웰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강의 중인 박성현 교수다. 박 교수는 이스라엘 히브리대와 텔아비브대에서 고고학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근동어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금의 대학에 정착했다. 책은 박 교수와 과학자인 아내 장현경 히브리대 박사가 같이 쓴 공동 저작물이다. 인종차별의 아픔으로 시작된 책은 이스라엘에서 미국으로 아내와 이주한 그가 한국어와 스페인어, 영어와 히브리어, 포르투갈어 등 5개국어를 넘나들며 교수 역할과 라티노 사역에 집중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가난한 환경을 극복해 성공했다는, 흔한 이민자·유학생 성공기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특별한 건 인종차별의 아픔을 승화시켜 상처를 준 이를 품은 박 교수의 삶과 사역 때문이다.
비결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구겨진 가정형편을 펴보려고 노력하던 중 하나님을 만났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가업을 돌봤지만, 사업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몸져누운 어느 날, 그는 얼결에 마음속으로 성경 한 구절을 듣는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벧전 1:24~25)로 시작하는 말씀이었다. 정확한 의미도 몰랐지만, 이 말씀을 듣자 계속 눈물이 나왔다. 이윽고 이렇게 고백한다. “내 가슴을 친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임을 믿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것임을 알았으니, 내가 그리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이후 박 교수는 신앙의 힘에 기대 경제적으로나 실력 면에서 한참 기준에 모자랐던 상황임에도 이스라엘 유학을 감행한다. 이스라엘 학비가 전액 무료인 걸로 알고 천신만고 끝에 편도로 거금의 항공료를 마련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아 배수의 진을 치고 학업에 임한 사연, 학부를 마치고 미국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으나 잠깐 가르치게 된 팔레스타인 학생의 열악한 환경이 맘에 걸려 꿈을 접고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바이블컬리지 교수로 일한 이야기 등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미국으로 터전을 옮긴 뒤론 저자 부부의 시선이 힘겹게 이민 생활을 하는 남미인에게 맞춰진다. “한때는 내가 그들 나라에서 이민자로 살았는데, 이제 와 내 옆에서 나보다 어려운 이민자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말할 수 없이 측은했다.”
처음부터 어린 시절의 상처가 쉽사리 극복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히브리어를 못 하던 시절, 이스라엘에서 남미계 유대인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 역시 남미인을 선대(善待)하기로 마음먹는다. 박 교수는 고든콘웰대 남미인 제자를 살뜰히 보살피는 한편, 중남미 출신 보스턴 노숙인을 돌보며 그간 자신을 괴롭혀온 오해와 편견,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는 “한 달란트를 받은 연약한 우리 부부가 이만큼 결실하며 살아올 수 있던 건 그 한 달란트의 주인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라며 “하나님이 남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도록 내 어린 시절을 인도했다”고 고백한다. 인종차별 문제로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는 지금, 상처를 안고 과거의 적에게 손을 내민 박 교수의 용기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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