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에서 영감 얻은 프란츠 클라인 | 서예 영향 끝내 부인..'재즈의 즉흥성' 강조

2021. 4. 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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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전후 시기에 등장한 서양 추상화 거장 가운데 많은 이들이 아시아 사상과 문화 예술, 특히 서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그중에 몇몇 인물은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유독 논란의 중심에 선 이가 있다.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과 더불어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1인자가 되기를 원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뉴욕이 파리로부터 세계 미술의 메카를 빼앗던 역동적인 시기를 대변하는 양식이며, 클라인은 그 대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타계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은 그가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예의 영향을 부인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한 점인 1957년작 ‘무제’를 보자. 역동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에 찬 힘찬 붓질이 눈길을 사로잡는 대형 흑백 추상화다. 즉흥적인 느낌을 강하게 발산하는 뿌리기 기법의 폴록과 에너지를 방출하는 거친 붓질의 드 쿠닝의 장점을 합친 듯한 멋진 대작이다. 통제와 절제보다는 대담함과 즉흥적인 에너지를 중시하는 액션 페인팅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힌다. 이 작품은 2012년 11월 14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4000만달러(약 453억원)에 낙찰돼 지금까지도 그의 전작 가운데 경매가가 가장 높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는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1957년작 ‘무제(Untitled)’. 2012년 11월 14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낮은 추정가의 두 배가 넘는 약 4000만달러(약 453억원)에 낙찰돼 그의 전작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작품.
즉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는 폴록의 뿌리기 그림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목이다. 그는 버려진 전화번호부를 스케치북 삼아 거기에 화법 연습을 했다. 구도, 붓질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실험한 것으로, 강력하고 재빠르게 실행된 대담한 붓질은 부단한 연습의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하나의 드로잉을 크게 확대해 복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리허설처럼 다양한 화법을 반복적으로 훈련했다. 덕분에 실제 캔버스에 작업할 때, 망설임과 주저함 없이 재빠르게 붓질을 해 즉흥적 에너지를 표현해낼 수 있었다.

다른 추상표현주의 화가처럼 그도 처음에는 구상화로 출발했고, 1940년대 후반부터 추상화를 시작했다. 그의 작품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한 것은 당시로서는 신문물이었던 벨-옵티콘(Bell-Opticon)이라는 프로젝터였다. 동료인 드 쿠닝이 이 프로젝터로 확대해 얻은 이미지 조각을 활용해 그리는 새로운 추상화 기법을 소개해준 것. 이때 클라인의 드로잉들도 확대해줬는데 여기에서 엄청난 영감을 얻었다. 확대된 자신의 드로잉에서 그가 본 것은 극도의 단순함과 동시에 어둠과 빛이었다. 이때부터 클라인은 움직임이 주는 순수한 에너지를 화폭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50년부터는 여기에 유화와 가정용 에나멜 물감의 혼합이 주는 독특한 질감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 자신만의 독특한 흑백 추상화를 선보이게 됐다.

클라인의 독창적인 흑백 추상화는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 서체와 서예의 영향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이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그림은 서예가 아니라 ‘석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자신이 광산과 철강업이 주를 이뤘던 펜실베이니아 출신임을 근거로, 자신의 대범하고 활력 넘치는 대형 추상화가 거대한 스케일의 미국 산업에 내재된 감성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으리라.

그의 추상화는 캔버스에 하얀 바탕을 칠한 후, 검정색 붓질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흰색을 칠한다. 그 후 대범한 붓질로 검은색 형태를 그리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흑백화는 구축적 특성을 지닌 구조적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분명 서예와는 전혀 다른 측면이라 하겠다. 또한 드라마틱한 에너지, 자유와 역동성을 포착한 클라인의 추상화는 계획된 즉흥성이기는 하지만 화가가 자신의 작품과 맺은 물리적, 정서적 관계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액션 페인팅의 측면이 강하다. 당대 추상표현주의가 추구하던 평평한 추상성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흑백 추상화는 그 어떤 그림보다 ‘미국적’이다.

1952년작 ‘무제 2(Untitled II)’. 일본의 서예 잡지인 ‘묵미(Bokubi)’의 표지에 실린 작품. 아시아 서예가들과의 교류를 짐작게 한다. ‘프로빈스타운 2(Provincetown II, 1959년)’. 흑백 회화 이후 다채로운 색상을 도입한 색면 추상화. 2015년 5월 13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900만달러가 넘는 금액(약 101억원)에 낙찰됐다. 푸른 하늘과 바다로 유명한 매사추세츠주 남동부 케이프 코드 지역의 휴양지에서 작업한 그림이다. 클라인이 흑백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추상화를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전화번호부에서 뜯은 종이에 그린 1952년작 ‘무제 2’를 보라. 그는 일본의 현대 서예인협회(墨人會)와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했는데, 잉크와 유화를 섞어 그린 이 작품은 묵미(墨美·Bokubi)라는 일본 서예 잡지의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전술한 1957년작과 같은 자신의 흑백 회화에 대해 언급할 때 “검은색처럼 흰색을 그렸다. 흰 바탕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는 여백을 죽은 공간이 아니라 회화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아시아 문인화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이런 언급이나 서예 잡지 표지에 실린 사실만 갖고 그의 작품이 온전히 서예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클라인의 추상화는 분명 독창적이다. 드 쿠닝처럼 현실의 일부를 남기거나, 폴록처럼 내면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기보다는 재료의 물성을 통해서 이제까지 표현되지 않은 새로운 추상 형태를 창조해냈다. 또한 미국 문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화폭에 강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서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것 또한 명료해 보인다. 그런데 왜 그는 부인했을까.

거기에는 문화적 패권 다툼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예술의 메카가 되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수립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클라인의 흑백화는 미국이 자랑하는 추상표현주의의 특징과 서예와의 연관성이라는 시각적으로 명백한 미학적 특질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그의 작품 안에서 예술적으로 영감을 준 동아시아의 서체와 미국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미국 미술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정치적 동기를 지닌 미술사적 해석들 사이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 그의 작품에서 1950년대 뉴욕에서 번성한 재즈 음악의 즉흥성을 느끼는가. 아니면 진한 먹을 머금은 굵은 붓으로 힘차게 그린 서체를 보는가.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3호 (2021.04.07~2021.04.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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