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정당한 富는 부끄러운 게 아니거늘

2021. 4. 7.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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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자금 출처 분명하고
적법하게 구입했다면 고래등
기와집도 허물되지 않아

전셋값 9% 올려 비난받는데
한편에선 23% 올리고도 당당

시장원리 따른 합리적 거래마저
죄악시할 경우 ‘淸富’ 요원


전국에서 가장 비싼 집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서울 한남동 단독주택이다. 대지면적 1245㎡, 연면적 2983㎡의 이 회장 소유 주택의 올해 공시가격은 431억5000만원에 이른다. 부동의 1위다. 단독주택 공시지가의 시세 반영률이 50% 선을 약간 상회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 집의 시세는 800억원대로 추산된다. 시세 기준 수억원짜리 아파트 한 채만 갖고 있어도 감지덕지인 보통사람들에게 이 회장 자택의 럭셔리함은 가늠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회장이 이런 호화주택에 살았다고 시비하지 않는다.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우리나라 최고 갑부가 가장 비싼 집에 사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자유시장경제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은 ‘나도 돈 벌어 저런 집에 살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한다. 더 크고 비싼 집에 살고, 더 맛난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설사 이 회장이 한남동 주택보다 비싼 집에 살았다 해도 별 문제되지 않았을 거다. 이 회장에겐 그만한 재력이 있었다. 정당하게 번 돈으로 법적 하자 없이 살 집을 짓거나 구입하고, 입주 뒤 꼬박꼬박 세금을 냈다면 고래등 기와집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부산 엘시티는 부촌의 상징 서울 타워팰리스에 비견되는 곳이다. 해운대에 위치한 이곳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부산의 최고급 주거단지로 꼽힌다. 부산시민이면 한 번쯤 살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양 당시 거액의 프리미엄이 붙었고, 온갖 특혜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감옥에 간 이도 여럿이다. 특혜 시비가 있었다고 해서 엘시티 거주민 모두가 특혜를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금 출처가 명확하고 분양이나 구입 과정이 적법했으면 하등 구릴 게 없다.

4·7 보궐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가 이곳에 산다. 굳이 으스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이 후보는 ‘민망하다’고 한다. 시민들은 어렵게 사는데 자신은 고가 아파트에 살아서 민망하단다. 본인 해명대로 특혜나 불법이 없었으면 문제될 게 없다. 고가 주택에 산다고 어렵게 사는 시민을 위한 정책을 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재력이 충분한데 서민 코스프레 한답시고 보여주기 식으로 허름한 집에 사는 게 오히려 민망하다.

사전 정보를 악용한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로 공정의 문제가 다시 최대 사회이슈로 떠올랐다. ‘LH로남불’이란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사회 논의 구조가 ‘기승전부동산’으로 귀결되고 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 광풍이 연상되는 요즘이다. 이 광풍에 휘말리면 어떤 해명도 소용없이 ‘부동산 공적’으로 낙인찍힌다. 4·7 보궐선거에서도 부동산 문제는 다른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블랙홀이 됐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경우 기억에 남는 건 생태탕뿐이다.

여당의 한 의원이 이 광풍의 유탄을 맞았다. 전셋값 인상 폭을 5%로 제한한 임대차 3법이 시행되기 전 전셋값을 9% 올린 게 화가 됐다. 담뱃값 인상이 예고되면 미리 한 갑이라도 더 사놓는 게 경제학 원리에 따른 일반적 선택인데 이 의원에겐 이런 상식이 용납되지 않았다. 더욱이 신규계약이어서 법적으로 전월세 상한제 적용 대상이 아닌데도 임대차 3법 개정을 주도하면서 어떻게 9%를 올릴 수 있냐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반면 전셋값 23%를 올린 야당 의원은 도리어 큰소리친다. 세입자가 새로 들어와 주변 시세에 맞게 올린 것이며, 낮게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그랬다고 한다. 이 의원은 “시장원리에 반한다”며 임대차 3법에 반대했었다. “시세대로 받는 걸 비난할 수는 없다”는 이 의원의 말, 백번 옳다. 두 의원 다 시세대로 받았다는데 임대차 3법 찬반 입장에 따라 9% 올린 의원은 비난받고 23% 올린 의원은 큰소리치는 사회,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임대인인 동시에 임차인인 경우가 많다. 임대인 입장에선 야당 의원이고 싶고, 임차인 입장에선 여당 의원을 만나고 싶어 한다.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청빈(淸貧)’은 있는데 ‘청부(淸富)’란 단어는 없다. 깨끗하면 가난하기 마련이라는 오랜 고정관념의 산물일 테다. LH 사태는 이 낡아빠진 관념을 새삼 사람들 가슴속 깊이 각인시켰다. 국어사전에 청부란 단어가 등재되는 날이 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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