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 "배우들 몫이 컸다"..뻔한데 뻔하지 않은 이준익의 '말'

류지윤 2021. 4. 4. 12: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4번째 신작 '자산어보', 지난달 31일 개봉

이준익 감독의 '역사 덕후' 기질은 '황산벌', '왕의 남자', '사도', '박열', '동주' 등 지금까지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역사의 중심이 되는 사건과 인물보다는 그 옆에서 잘 보여지지 않았던 인물을 함께 조명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찾는다. '왕의 남자' 공길이 그랬고, '박열'의 후미코, '동주'의 송몽규가 그랬다. 이번에도 정약용의 형 정약전,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창대란 인물에 현미경을 가져가 이야기를 확장시켰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1814년(순조 14년)까지 생활하면서 이 지역의 해상 생물에 대해서 분석해 편찬한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왜 만들었는지, 어부 창대와는 어떻게 우정을 나누게 됐는지를 통해 시대적 배경과 민초의 아픔을 전달한다.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정치에 목말라있던 정약전의 고뇌, 자신이 믿고 있던 성리학이 답이라고 믿던 창대의 뒤늦은 깨달음은 조선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닌, 2021년 현재를 관통한다. 이준익 감독은 감정이나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단, 관객들이 직접 찾을 수 있도록 은유와 비유로 '자산어보'를 채워넣었다.


"관객들이 '자산어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져가는 메시지는 다를 것 같아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영화다보니 만드는 사람은 어렵게 공부해도 보는 사람은 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자산어보'를 만드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어요. 소재도 어려웠고요. 제일 중요한 대사인데 무슨 의미인지 모를 때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 쉽게 전달된 건 배우의 몫이 컸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인물의 감정과 생각이 납득이 되더라고요."


이 감독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정약전을 주목한 이유는 호기심이었다. 같은 시대에 형제가 똑같이 유배를 갔는데 정약용은 인문과학서 '목민심서', 정약전은 자연과학서인 '자산어보'를 썼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누구나 알죠. 읽지는 않았지만 교과서로 배워잖아요. 사실 저도 안읽어봐서 몰랐다가 영화를 준비하며 읽어봤어요.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 지침서' 같은거죠. '자산어보'는 '목민심서'보다도 읽어본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아는 사람도 많지 않죠. 형제가 왜 이토록 다른 책을 썼을까 이유를 따져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상업적으로 어려운 영화였어요.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왜 내가 이 영화를 하겠다고 했지, 내가 미쳤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 자산어보의 길이 아닌,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란 창대의 대사가 있는데,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산어보'의 길은 무엇이고, '목민심서'의 길은 무엇인지 쉽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만나 청년 창대와 서로의 지식을 나눈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창대는 정약전에게 해양생물 지식을 전하며 서로가 서로의 스승, 벗이 된다.이 두 사람을 통해 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입장의 전환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잖아요. 서학에 몸을 담았을 때 정약전은 제사를 금하라는 말에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란 말을 들어요. 이후 유배지에서 더 작은 우물 안에 있는 창대를 보게 되죠. 또 성리학을 고집하며 다른 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창에게 자신이 들었던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란 말을 합니다. 창대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 거죠."


이준익 감독은 영화 초반, 정약전이 흑산도로 배를 타고 들어갈 때의 모습은 흑백으로 담았지만, 말미 창대가 흑산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컬러로 연출했다. 이는 등장 인물들의 감정들을 대변하는 연출이었다.


“같은 검은색이라도 원래 검은색이 있고, 여러 색이 섞여서 검은색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흑산은 본래 어두운 검정을 뜻해요. 약전이 들어갈 때 흑산은 무섭고 두려웠으나, 창대가 돌아갈 땐 못보던 세상을 발견한 후죠. 그래서 컬러로 만들었어요. 흑산(黑山)이 자산(玆山)으로 바뀌는 건, 창대의 감정, 즉 다양한 색이 다 섞여서 만들어진 검정을 의미합니다."


'자산어보'는 처음부터 흑백 영화로 기획했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은 컬러 영화보다 더 세련된 미학을 담을 수 있는 좋은 연출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흑백은 이제 옛날 한물간 비주얼이 아닙니다. 과거 컬러가 나오기 전, 부족했던 기술로 나왔던 흑백은 한물 간 게 맞아요. 그러나 모든 컬러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Full HD 화질이 나오는 시대의 흑백은 세련되고 멋있고 특별하죠. 있지도 않은 컬러가 보이기까지 해요. 사람들이 흑백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흑백은 컬러보다 더 세련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흑백 영화로 연출할 땐 그림자, 명암에 따라 소품을 배치하는 것 외에는 크게 컬러 영화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컬러 영화가 연출적인 차이라기보단, 기술적 차이가 있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색깔이 있으면 어지러워요. 이게 컬러면 배색을 잘 해서 담아낼 수 있는데, 흑백은 명도 차이가 다 달라서 지저분해보이죠. 그래서 흑백에 맞게 명도를 계산해 소품을 배치합니다. 의상, 분장도 마찬가지고요. 눈에 보이는 건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두움 밖에 없으니 그 점을 유의해서 준비하려 합니다. 우리나라 미술, 분장팀들이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어 준비하는 과정이 어렵진 않아요."


영화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만 그리지 않았다. 곳곳에 가거댁의 입을 빌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향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씨만 귀한 줄 알고 밭 중한지 모른다'는 가거댁의 대사는 실제 자료 속에 기록된 문구를 가져온 것이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유배를 가던 도중 들린 주막 할머니가 한 말이었어요. 200년 전에도 지금의 여성관을 관통하는 말을 했다는게 신기하더라고요. 이 말을 포용력이 좋은 이정은 배우가 함으로 더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리라 생각해요."


설경구는 데뷔 후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했지만,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설경구는 '자산어보' 속 정약전 그 자체로 보여졌다. 이준익 감독 역시 '소원'으로 한 번 호흡을 맞춰본 설경구를 향한 믿음이 깊었다.


"설경구는 조선 선비의 대표성을 띈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비주얼이었어요. 갓도 잘 어울리고 수염도 잘 어울리고 한복이며 자세, 말투까지 자연스럽더라고요. 선비 특유의 톤과 대사도 너무나 잘해줬어요. 그리고 이번에 새삼 설경구가 잘생겼다고 느꼈어요. 사실은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영화 찍으면서 감탄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설경구만큼 창대 역의 변요한도 제 몫을 해냈다. 직접 낚시를 배우고 해양생물에 공부까지 한 변요한을 보며 이준익 감독은 "이래서 배우들을 존경한다"고 칭찬했다.


"상상초월의 역량을 발휘해줬어요. 대단한 배우죠. 변요한에게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을 해내려는 간절함들이 보였어요. 연기에 임하는 마음과 준비된 자세가 너무 매력있는 배우더라고요. 보여지는 것만 평가하지말고, 그걸 이뤄내려는 태도까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전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못하거든요. 변요한 뿐 아니라 이제훈, 유아인, 강하늘, 박정민 모두 그랬어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극장 상황이 예전같지 않은 지금, 이준익 감독은 이런 시국에 개봉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자산어보'가 다음 개봉할 영화들의 디딤돌이 되길 바라고 있엇다.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계속 이어져서 걱정스러워요. 다행히 '미나리'가 큰 역을 해줬어요. 완전히 무너져가는 극장가를 일으켜줬죠. 그 뒤를 '자산어보'가 맡게 됐는데, 다음 영화들이 하루빨리 나올 수 있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코로나19 이겨내야죠."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