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선 밥 먹고 잘 뿐인데..'영끌' 아파트? 난 캠핑카 산다

박건 2021. 4. 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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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제64화>
캠핑카·버스에서 사는 '밴 라이프'
래춘씨가 캠핑을 즐기고 있다. 본인 제공

"어느 날 소파에 앉아 있는데 '집안에서 하는 게 밥 먹고, 씻고, 자는 게 전부인데 굳이 콘크리트 집(아파트)에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말에 바로 캠핑카를 알아봤죠." -래춘씨(활동명·30대)
비취색 제주 바다와 맞닿은 공터에 덩그러니 주차된 1톤짜리 캠핑카. 12㎡(3.6평) 남짓한 내부엔 접시, 프라이팬 같은 주방기구와 대형 모니터 3대가 연결된 컴퓨터 등 생활 집기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정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유튜버 래춘씨가 사는 집입니다.

래춘씨처럼 정해진 주거지 없이 자동차를 집 삼아 지내는 생활을 '밴 라이프'(Van Life)라고 부릅니다. 외국에서 낡은 밴을 개조해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유래했죠.

유튜브에 '밴 라이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화면. 유튜브 캡처

몇몇 유별난 이들의 기행으로 보인다고요?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길 거부하고 밴 라이프를 꾸리는 청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치솟는 집값에 대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해서 집 사는 것보다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캠핑카 생활이 이들에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거죠.

밀실팀이 밴 라이프를 선택한 청년 3명을 만났습니다. 바퀴 달린 집에서의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집-직장' 왕복이 안정적? 여행하듯 살고파

지난달 25일 제주도에서 밀실팀과 인터뷰하는 래춘씨. 석예슬 인턴

"회사와 학교의 공통점이 1명의 합격자를 배출하려고 100명의 실패자를 계속 만드는 구조잖아요. 그런 시스템에서 버티는 게 안정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년째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밴 라이프를 택한 이유를 묻자 래춘씨가 되물었습니다. 유명 방송국에서 편성·기획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집과 직장을 왕복하는 삶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는 생각에 밴 라이프를 시작했죠.

다른 이들도 이와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남들 눈에 번듯한 삶을 살고자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여행하듯 자유롭게 지내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요.

캠핑 중인 김수향씨. 유튜브 'Vanlife Korea 수향' 캡처

지난해 밴 라이프를 시작한 유튜버 김수향(29)씨는 6년 전 떠난 호주 워킹홀리데이 덕분에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 모두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가 아닌 삶의 목표에 대해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취업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하다가 이 생활을 택했다"고 말하더군요.


물·전기 부족은 일상, 그마저도 매력
어느 하나 거저 주어지는 게 없는 생활. 불편함은 밴 라이프에서 마땅히 감수해야 할 조건입니다.

밀실팀이 만난 이들은 생계유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전했습니다. 원격근무가 일반화하면서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수입을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월세 등 주거비가 사라지면서 생활비 자체가 줄어들기도 했고요.

지난해 태풍 '마이삭'이 북상했을 때 래춘씨가 차 안에서 찍은 영상. 유튜브 '래춘씨 생존기' 캡처

다만 물과 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2년 전 24인승 버스를 사서 개조해 살고 있는 유튜버 지금게르(활동명·28)는 "해수욕장 개수대나 공원 수돗가에서 물을 받지만 한계가 있다.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매달 일정 금액을 내고 3~4일에 한 번씩 물을 채우러 간다"고 했습니다.

전기사용량이 많은 여름은 특히 고역입니다. 캠핑용 태양광 발전기가 있지만, 열대야가 며칠간 이어지면 선풍기도 없이 무더운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다고 해요.

하지만 이 불편함도 밴 라이프의 매력이라고 합니다. 래춘씨는 "내가 일한 만큼만 정확히 물과 전기를 쓸 수 있어서 그런지 더 능동적으로 살게 된다. 집에서 수도꼭지 틀면 물이 콸콸 나오던 예전보다 삶에 주인 의식이 생겼다"고 밝혔죠.


'미X 놈' 소리 듣지만, 사람 사는 방식일 뿐

지난달 31일 전남 순천에서 밀실팀과 만난 김수향씨. 백경민

남과 다르게 생활하면서 받는 주변의 시선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김수향씨는 "여자라서 그런지 특히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너 요즘도 거기서 자냐'고 묻는데 그런 반응에 익숙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고 털어놨죠.

래춘씨도 집을 나와 캠핑카로 이사할 때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X 놈'이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직 우리 사회가 다양한 주거 형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이것도 사람 사는 방식이라 이해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게르가 차 안에서 식사하는 모습. 유튜브 '지금게르' 캡처

아직도 밴 라이프가 청년들의 치기 어린 일탈로 보이시나요? 밀실팀이 만난 이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밴 라이프를 계속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나중에 부동산을 살 정도로 돈을 모아도 차 안에서 살 건지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죠.

"가본 여행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버스 한 대 세울 수 있는 작은 땅을 살 것 같아요. 더 여유가 있으면 아파트를 살 게 아니라 45인승 버스를 사서 그 안에서 살겠죠. 하하." -유튜버 지금게르

박건·백희연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석예슬·장유진 인턴, 백경민

「 밀실은 '중앙일보 밀레니얼 실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밀도있는 밀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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