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자학'은 힘이 세다
지난달 30일 발표된 일본 교과서 검정 결과를 놓고 분노한 건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일본 우익의 입장을 (자주) 대변하는 산케이 신문을 펼쳤다가 1면 톱기사에서 사설까지 화 난 기색이 역력해 당황했다. 원하던 대로 ‘독도=일본 땅’이란 억지가 사회 분야 교과서 30종에 전부 실렸는데 왜? 이유는 이거였다.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 대부분이 위안부를 다루는 등, 자학(自虐)적 경향이 강해졌다.”
현재 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 세계사·일본사 교과서 27종 중에는 11종에만 위안부 관련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역사종합 교과서는 12종 중 9종이 위안부를 다루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세계사와 일본사가 역사종합으로 합쳐지면서 전반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분량이 줄고 내용도 부실해졌다는 전문가들의 판단과는 정반대되는 해석이다.
그보다 관심을 끈 건 이들이 전매 특허처럼 사용하는 ‘자학사관’이란 표현이었다. 경제정책인 ‘세 개의 화살’이나 ‘후쿠시마 언더 컨트롤(후쿠시마는 관리되고 있다)’ 같은 말들을 보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조어력에 감탄해왔지만, 그가 유행시킨 가장 강력한 표현은 ‘자학사관’ 아닐까 싶다. 일본이 자국의 역사를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주장인데, 일단 ‘자학’이란 말의 울림이 크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성찰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움찔하게 된다. 나는 사실 훨씬 멋진 사람인데, 지금 자학하고 있는 건가?
산케이 신문이 이번 교과서 검정의 쾌거로 꼽은 것이 지유샤(自由社)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다. 아베 전 총리와도 관련 깊은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집필에 참여했다. 지난해 검정에서 탈락했다 올해 수정을 거쳐 통과된 이 교과서를 보면 이들이 말하는 ‘자학사관에 빠지지 않은 교과서’의 실체가 드러난다.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은 ‘조선 출병’이 됐고, 태평양전쟁은 일본서도 금기시하는 ‘대동아전쟁’이란 표현을 당당히 썼다. ‘창씨개명’은 한국인들에게 이름을 만들어 주려는 것이었다 등 깨알 같은 왜곡이 가득하다. 다행히 일선 학교들의 우익 교과서 채택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이런 내용이 검정을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로 충격적이다.
겹겹의 필터로 진짜가 아닌 나를 보며 “완벽해”를 외치는 것보단 ‘자학’이 건강하다. 그 바탕엔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겸허한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 아닐까. 뒤돌아보면 그들이 말하는 자학사관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시대의 일본이, 지금보단 훨씬 배울 점 많은 나라였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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