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한일전으로 확인한 소탐대실의 리더십
[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코로나19 팬데믹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꿨다. 축구계는 방역 체계에 심각한 변수를 몰고 올 수 있는 A매치 등의 국제 교류전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FIFA와 AFC 주최의 많은 국제 대회가 취소됐다. 상업적 규모가 큰 클럽대항전은 대부분 버블(방역 유지 구역)이 형성된 방역 최선 지역에서 단기간에 치러야 했다.
대한축구협회가 파울루 벤투 감독은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를 한일전의 최대 명분으로 삼았다. 언젠가 재개될 A매치와 월드컵 예선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오는 6월 한국에서 진행할 월드컵 2차 예선 잔여 경기를 앞두고 벤투 감독에게 선수들을 점검할 기회는 줘야 한다는 명분론이었다. 벤투 감독 역시 한일전 소집 명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번 대표팀 소집을 6월에 있을 월드컵 2차 예선 준비로 활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거듭했다.
■ "경기는 해야 한다"던 명분도 못 건진 벤투 감독
그 명분 덕에 한일전 개최의 정당성을 둘러싼 많은 의심과 우려는 '음모론'이나 '사실무근'으로 뿌리칠 수 있었다. 소통이 부족한 차출에 뿔난 K리그 팀들도 한국 축구의 앞길을 막는 모양새는 될 수 없다는 판단에 FIFA가 코로나 시대에 만든 차출 거부 규정 적용은 참았다. 그만큼 이번 한일전은 근래 어떤 A매치보다 기회비용이 가장 컸고, 그에 맞는 성과를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일전 그 자체가 저런 명분을 쥐기 어려운 성격의 A매치임을 대한축구협회와 벤투 감독만 몰랐던 것 같다. '너무과몰입 하지 말자. 이건 친선전 혹은 평가전일 뿐이야'라는 말로는 납득시킬 수 없는 한일전 그 자체의 무게감은 세월이 얼마나 지나든 변하지 않았다. 6월을 위해 훈련하고, 경기를 해야 하는데 4일 소집에 영양가 있는 실질 훈련은 이틀 밖에 못 하고 결과마저 잡아야 하는 한일전은 이미 "그래도 경기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명분에서 이미 크게 벗어나 있는 대진이었다.
벤투 감독 스스로도 딜레마에 빠졌다. 6월을 위한 점검과 테스트인지, A대표팀 감독으로서 라이벌전의 결과를 잡아야 할 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나온 선택이 이강인의 최전방 기용이라는 낯선 대응이었다. 일본 미디어도 경기를 앞두고 인정한, 전술적으로 완고하고 보수적인 벤투 감독이 한일전에서 갑자기 한번도 보이지 않던 전술,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 선택은 대실패였다. 한국은 전방에서 공을 지켜내지 못하며 금방 소유권을 넘겨줬다. 전세가 불리하면 전방의 존재감 있는 스트라이커가 투쟁적으로 싸우고, 발 빠른 측면 공격수가 양 측면 뒷공간을 파고 드는 것은 한국에겐 한일전을 치르는 '국롤'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자신조차 부임 후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모험수를 하필 한일전에 걸었고, 최악의 내용과 결과를 보여주며 자충수로 끝났다.
소속팀 감독이 대표팀에 갈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라고 호소했던 홍철의 기용도 실패로 끝났다. 후반에 날카로운 왼발을 몇 차례 보여줬지만, 전반에 홍철은 무리한 턴오버와 늦은 수비 가담으로 자신이 선 위치를 일본이 공략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불통 이미지를 본격화시킨 홍철의 소집과 그를 기용해 보여 준 결과물은 벤투 감독의 소신을 고집과 아집으로 만들었다.
0-3 패배라는 결과는 물론이고 내용 면에서도 긍정적 요소를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던 한일전이다. 과연 이강인을 가짜 9번으로 활용하는 전술은 벤투 감독 재임 기간 동안 또 볼 수 있을 것인가? 컨디션 저하에 이어 자신감 저하까지 닥친 선수들은 소속팀에 돌아가서도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결과를 위한 냉정한 대응을 한 것도 아니고, 6월을 위한 전술과 선수 테스트의 기회도 아닌 어정쩡한 스탠스를 잡은 벤투 감독은 결국 많은 여론의 반대에도 강행할 수 있었던 명분을 스스로 걷어찼다.
■ 지는 싸움 속으로 대표팀을 끌고 간 대한축구협회
벤투 감독의 책임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런 한일전의 결말이 예상 가능한데도 무리하게 추진한 대한축구협회도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한일전을 돈 때문에 하느냐는 지적에 여러 비용을 따지면 남는 게 별로 없다면 과연 이번 경기로 건진 것은 대체 무엇일까? 차라리 금전적 이득이라도 챙겨 코로나로 인한 적자 상황에 도움이 됐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일본축구협회가 애초 약속한 방역도 철저히 지키지 않은 부분에 대한축구협회는 항의를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1만여명이 입장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없이 앉아 있는 팬들, 경기장 내에서 음식물을 먹고 있는 관객 등의 모습이 중계 화면으로 버젓이 나왔다. 한일전을 앞두고 작년 11월 유럽 원정에서의 방역 실패를 교훈 삼아 철두철미한 지침을 소개한 대한축구협회지만 상대가 방역 지침을 느슨하게 한 경기장 환경 안에서는 도리가 없다.
손자병볍에서 말한다. 지는 싸움은 걸지 말고, 이기는 싸움에 나서라. 이번 한일전은 시작하기도 전에는 여러 의미로 지고, 잃는 것이 자명했던 승부였다. 그렇게 지는 싸움을 굳이 강행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벤투 감독, 두 리더의 판단은 지난 수년간 어렵게 쌓아 올린 한국 축구를 향한 신뢰와 인내를 일거에 무너트렸다.
선수 차출을 둘러싸고 축구계의 많은 분열을 자초했고, K리그 운영에 차질을 준 한일전의 여파는 이제 대한축구협회에게 숙제를 추가했다. A대표팀과 감독을 향해 무너진 신뢰까지 복구해야 한다. 향후 추이에 따라 또 한번 외국인 감독 잔혹사가 나올 지도 모른다. 거기에 들어가는 거대한 비용과 노력은 한국 축구의 다른 분야에 투입될 재화와 인력의 시간을 늦출 것이다.
소탐대실의 리더십. 2021년 3월 25일 요코하마에 남긴 90분이라는 대실패의 시간으로 확인한 한국 축구 최상위 단체의 현 주소다.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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