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나는 설씨 일가의 머슴, 수백억 비자금 관리했다"

김종철 2021. 3. 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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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방직 설원식 전 회장 비서실장의 폭로.. 26일 주총서 경영진 교체 표대결 관심

[김종철, 유성호 기자]

 안형열 전 대한방직 비서실 부장이 지난 2월 5일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설원식 전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지난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총수일가 차명계좌를 직접 만들고 운용했으며, 불법 비자금도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 유성호
최근 소액주주와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대한방직의 전직 회장 비서실 간부가 수십 년 동안 차명으로 총수일가 주식을 관리했으며, 수백억원에 달하는 불법 비자금 조성 등에 관여했다고 폭로했다.

안형열(전 대한방직 비서실 부장)씨는 지난달부터 최근까지 수차례에 걸쳐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고인이 된 설원식 전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수십여 명의 전직 임직원 이름을 빌어 주식과 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총수일가 차명계좌를 직접 만들고 운용했으며, 불법 비자금도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과거 설씨 일가와 전직 임직원의 증권계좌를 비롯해 은행 통장과 증권카드, 실물 도장까지 공개했다. 또 자신이 직접 쓴 차명계좌 운용 노트와 각종 증빙 서류 등도 내놨다. 이들 자료를 보면, 안씨가 어떻게 총수일가의 자금을 관리해 왔는지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또 안씨는 회사 비자금 등으로 국내 유명 화가의 미술품 등을 대거 사들여, 설씨 일가의 서울 장충동과 한남동 등 사저에 보관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들 미술품들은 설원식 회장이 지난 2015년 사망한 이후 자녀들에게 상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부 미술품의 경우 희귀 작품으로 미술계에서는 금액으로 따지면 수백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차명 증권계좌, 은행 통장, 증권카드, 실물 도장까지 모두 공개
 
 안형열 전 대한방직 비서실 부장이 공개한 차명계좌 관리 대장. 안씨는 지난 1985년부터 17년동안 설원식 전 명예회장의 비서를 역임했다.
ⓒ 안형렬 제공
1953년에 설립된 대한방직은 국내 첫 재벌이라 불릴 만큼 큰 회사였다. 1960년대 국내 재계 서열 5위였던 대한그룹의 모기업이었지만, 방직산업의 쇠퇴와 외환위기 당시 터진 진승현게이트와 한스종금(옛 아세아종금) 사태 등으로 재계 순위권에서 밀려났다.

대한방직은 창업주 설경동 전 회장의 장남인 설원식씨가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대한그룹에서 계열분리했다. 지난 1996년부터 설원식씨의 장남 설범씨가 대표이사로 올라선 이후 오너 3세가 경영을 해오고 있다. (관련기사:제2의 장하성·김상조? 그들이 재벌3세에 반기든 까닭)

안씨는 지난 1973년 대한방직에 입사한 후, 1985년부터 2001년까지 17년 동안 설원식 명예회장의 비서로 일했다.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회장님의 혈압을 체크하는 것부터 사적인 업무까지 도맡아 일했다"면서 "회장께서는 외아들인 설범씨 등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셨다"고 말했다. 

안씨의 주된 일은 회삿돈으로 임직원의 이름을 빌어 주식계좌를 만들어 운용하면서 설씨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서 업무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인수받은 차명 계좌는 200여명에 달했다"면서 "이후 1988년 전후로 몇 차례 증자과정과 금융실명제 도입 등으로 (차명) 계좌를 40여명 수준으로 줄여서 관리했었다"고 전했다.
 
 안형열씨가 대한방직 차명주식을 관리하면서 사용했던 임직원 도장들.
ⓒ 김종철
실제 지난 2000년 4월 3일에 작성된 '대한방직 차명주식 리스트'를 보면, 설씨 총수일가를 비롯해 임직원 등 40여명의 이름과 함께 구체적인 주식 수가 적혀 있었다. 안씨 역시 2955주를 갖고 있었다.

안씨는 "물론 적법한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기업들이 관례처럼 (차명으로) 주식을 관리했었다"면서 "보통 회사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별도의 장부를 만들어서 (관리)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계좌 운용 과정은 회장과 사모님께 자주 보고를 했다"면서 "주식 배당금 등 현금이 나올 때는 내가 사모님께 직접 전달하고 사인을 받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안씨는 "설 명예회장을 옆에서 가장 오래동안 모셨던 사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도 컸었다"면서 "하지만 한스종금 사태 등을 거치면서 뒤늦게 '설씨 일가의 머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회사 부실 책임은 월급쟁이 직원들만… 총수일가는 솜방망이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의 잇단 도산과 함께 금융권의 부실은 대한방직의 설씨 일가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2 금융권이던 종합금융회사의 부실과 구조조정은 정치권과 재계의 큰 이슈였다. 대한방직은 당시 아세아종금(이후 한스종금으로 개명)의 최대주주였으며, 1999년 말부터 아세아종금 부실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씨는 이 과정에서 차명계좌의 주식을 정리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역시 설씨 일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세아종금 부실 문제로 결국 대한방직 출신 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됐고, 일부 임원은 목숨을 끊기도 했다. 
 
 안형열씨가 지난 2000년 4월 아세아종금 부실사태에서 임원들의 차명주식을 매매한 내용을 기록한 서류. 오른쪽 아래부분에 '보고 완'이라는 표현은 설원식 당시 명예회장에게 주식매매를 보고했다는 의미다.
ⓒ 김종철
안씨는 "당시 설씨 일가는 차명주식을 포함해 부동산과 미술품 등 재산이 많았다"면서 "아세아종금 사태로 월급쟁이 임원들은 재산을 차압 당하고 옥고를 치렀지만, 총수일가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물론 아세아종금 부실사태로 설원식 명예회장도 처벌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설 회장이 나이가 많고 지병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불구속기소 했고, 법원에서는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안씨는 2000년 9월 미국 하와이에 머물러 있던 설 회장을 직접 찾아 검찰 소환 등을 대비하기도 했다. 안씨는 "사실상 명예회장께서 아세아종금 문제를 떠안고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당시 거액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했고, 검찰과 회장님의 귀국, 기소 여부 등에 대해 사전 논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안씨 역시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에 이어 회사를 장악한 설범 회장은 차명계좌 운용을 두고 안씨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결국 그는 회사로부터 쫓겨나듯 나와야 했고, 회사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고백하고, 법의 심판을 받으려고 했다.

20년만에 설씨 일가 비자금을 폭로한 이유

안씨는 "지난 2005년에 부패방지위원회에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불법행위를 비롯해 설씨 일가의 탈법 행위를 정리해서 제출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검찰은 나를 단 한 차례도 부르지 않았고, 제대로 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회사 쪽으로부터 온갖 압력을 받았고 결국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난 2006년 베트남으로 자리를 옮겨, 6년 넘게 타향살이를 해야만 했다.

20년 만에 공개석상에 나선 이유에 대해 그는 "지난 1월 중순께 우연히 대한방직 임시주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소액주주 대표 등과 만나면서 그들의 뜻에 함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형열씨의 대한방직 차명주식 매매 등을 적어놓은 관리 대장 일부.
ⓒ 김종철
대한방직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소액주주 쪽에서는 안씨의 양심고백을 높게 평가했다. 소액주주를 대표하고 있는 강기혁 바른투자연구소장은 "지난 1월 임시주총에서 회사 쪽 차명주식으로 의심받고 있는 주주를 상대로 이미 업무방해죄로 고소를 해놓은 상태"라며 "안씨가 공개한 자료를 통해 회사의 차명주식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매매가 이뤄졌는지가 보다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강 소장은 "오는 26일 정기주총에서 안씨를 소액주주를 대표해서 감사후보로 추천할 것"이라며 "지난 임시주총 때 소액주주를 지지했던 의결권만으로도 안씨의 감사선임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20년 전 현 회장에게 해고돼 회사를 떠났던 안씨가 감사로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게 된다. 이와 함께 소액주주 쪽은 현 경영진에 대한 해임안도 상정해 놓은 상태다.

대한방직 "차명계좌 확인 어려워, 불법 자금 운용 사실 없어"

한편 안씨의 회사 차명계좌와 비자금 운용 주장에 대해 대한방직은 "과거 최대주주의 차명계좌 운용 여부 등에 대해선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불법적인 자금을 운용한 사실도 없다"며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회사 고위관계자는 23일 <오마이뉴스>에 "현재 회사 안에서는 안씨와 같이 근무한 직원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약 안씨의 주장대로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과연 그동안 사법당국이 가만히 놔두었겠는가"라며 비자금 운용 등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소액주주쪽에서 안씨를 감사후보로 추천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그쪽에서 안씨의 감사추천을 담은 주주제안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라며 "당일 주주들의 투표 향배에 따라서 감사선임 등의 여부가 결정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쪽은 지난 1월 임시주총에 이어 26일 정기주총에서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영진 선임 등에 대해 주주들의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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