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한번도 경험못한 나라 됐네"..덫이 된 文 "공정" 취임사

윤성민 2021. 3. 2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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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낮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취임행사에서 제19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취임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사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씻어내고 신뢰의 자본을 쌓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농단 사건으로 오히려 국민의 불신은 커졌고 신뢰는 무너졌다. 그렇게 역대 대통령 취임사는 임기 말이면 오히려 덫이 되곤 했다. 부정부패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은 희망찬 약속으로 가득찼던 취임사를 다시 꺼내 대통령을 비판하곤 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또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부동산적폐청산시민행동 회원들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부동산적폐 3적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적폐 청산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2017년 5월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대목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였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1월부터 이 대목은 부정적인 의미로 회고되기 시작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논란 때문이다.

정부가 올림픽을 앞두고 급하게 남북 단일팀 구성을 추진하자,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남측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잃게된다. 불공정하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모습이 청년층의 예민한 ‘공정 감수성’을 건드린 것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선수들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 뒤에도 불공정 이슈는 현 정부의 발목을 자주 잡았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 전환 때 청년층은 채용의 절차적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서울교통공사 친인척 특혜채용,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등도 청년 취업난과 맞물려 불공정 이슈로 확대됐다.

정점은 ‘조국 사태’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은 국론 분열로까지 커졌다. 결국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의 자녀 입시 비리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국민의힘은 “이제 정권은 ‘공정’을 입에 담지도 말라”고 비판했다. 최근 LH 투기 의혹이 다시 불거지자 또다시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는 취임사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이른바 조국흑서로 불리는 책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지난해 9월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책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김경율 회계사,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강양구 과학전문기자 겸 지식큐레이터 등의 대담집으로, 현재의 진보에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취임사 첫 문단에서 “제 가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라고 했다. 과거 정부와 선을 긋고 더 나은 정부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임기 후반 이 문장은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하기 위한 반어적 문장으로 더 많이 사용됐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해 7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 취임사를 거론하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께서는 ‘국민이 행복한 나라’, ‘내 삶이 나아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국민들에게는 점점 좌절과 분노만 쌓여 가고 있다”면서 “대통령 취임사 중에 유일하게 지켜진 것이라고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뿐이라고 국민들은 냉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중권 동양대 전 교수와 서민 단국대 교수 등이 쓴『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도 문 대통령의 취임사를 반어적으로 사용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저자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와 공정의 가치가 무너졌다고 주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고 비판했다. 최근엔 현 정부를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김종혁)도 출간됐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18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취임하며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에겐 ‘불통’이라는 비판이 있었기에 문 대통령의 소통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약 4년이 지난 현재 문 대통령의 소통 성적도 좋은 편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우선 취임사에서 소통을 언급하며 “광화문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과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라고 약속했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됐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라고도 했지만 국민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고 했다. 임기 초반엔 실제로 문 대통령이 춘추관에서 입장을 발표하곤 했다. 하지만 임기 중반을 넘어 부동산 폭등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문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갈등 상황 등이 불거졌을 때 문 대통령은 침묵하거나 참모를 통해 대신 입장을 밝혔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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