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새로운 성적평가 요소 '질의응답'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보라"
알려하지 않음을 부끄러워 해야

방역지침에 따라 강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다 보니 세 학기째 수강생들의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대학에서 제공한 실시간 화상 강의 프로그램이 영상과 음성은 그럭저럭 전달하지만, 음악이나 악기 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왜곡하기 때문에 사전에 강의를 녹화하여 제공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실시간 소통을 포기했으니 이제 학생들과의 유일한 소통수단은 서면으로 가능한 질의 응답뿐이다. 정상적인 대면 강의 때도 질문이 많지 않은 편이었으니 비대면 강의와 병행하는 서면 질의가 가물에 콩 나듯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궁여지책으로 이번 학기 성적평가 기준에 질의응답 참여도를 새로이 추가했다. 구체적으로 매주 최소한 한 개 이상 질의해야 한다고 공지했다. 대성공이다. 한 개 이상이라 했음에도 각기 서너 개에 달하는 질문을 쏟아낸다. 아주 초보적인 것부터 학기 말 즈음에 다룰 내용까지,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워 보충설명을 해야 하는 것부터 다른 관점을 제기하여 토론을 해야 하는 것까지. 열댓 명이 수강하는 두 시간짜리 전공 교과목 하나에 제기되는 질문이 매주 수십 개에 달한다. 한 질문에 답하는데 10분씩만 잡아도 정말 심하게 밑지는 장사(?)를 시작했다.
해당 교과목, 그것도 그 주의 강의 주제에 국한된 질문이지만, 어떤 질문 하나만으로도 그 학생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강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수강에 필요한 사전 지식과 경험이 어느 정도인지, 규범에 순응하는 편인지 도전적인지, 더 나아가 열등감, 우월의식, 자신감, 적극성 등 개인적 성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한국 학생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공통된 지적은 대체로 질문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러하니 그것이 언어 문제만은 아닐 게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극적 자세로 보일 수도, 예의상 교수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질문의 전제, 즉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다른 견해를 논증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니까. 이 자존심과 논증의 두려움이 문제 해결 의지를 압도하는 순간 질문은 묻힌다. 반면 그것이 ‘앎’을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라 여기는 학생은 질문을 통해 한 걸음 더 내디딘다. 그러니 그 기회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세는 미래의 자신에 대한 자해(自害)나 다름없다.
“아빠! 저렇게 크고 무거운 비행기가 날갯짓도 안 하고 어떻게 하늘을 날아요?” 누구나 한 번쯤 했거나 들었을 법한 질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의 질문은 밤낮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여섯 살 위 형과 세 살 위 누나는 꼬마 시절의 막내를 무척이나 귀찮아했다. 그래도 그 형과 누나 덕에 그 꼬마는 하루하루 똘똘함을 더하며 자라날 수 있었다. 영화와 뮤지컬로 널리 알려진 ‘오즈의 마법사’에서 소녀 도로시는 ‘머리(뇌)’를 원하는 허수아비, ‘심장(마음)’을 원하는 양철 나무꾼, ‘용기’를 원하는 겁쟁이 사자와 함께 마법사 오즈를 찾아간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갖은 고생 끝에 만난 오즈는 ‘어마(어쩌다 마법사)’였기에 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도리가 없다. 결국 오즈가 엉터리 뇌와 심장, 그리고 거짓 약(물)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위약(僞藥) 효과가 아니다. 오즈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그 소원을 부지불식간에 이루었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앎(知)과 마음(德), 그리고 용기는 이렇게 부족함을 자각하고 채우고자 행하는 여정을 통해 얻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질문이 깨달음의 첫 단추이며, 문답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앎’의 참된 여정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교육 방법이다. 공자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으니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알고자 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라는 가르침으로 읽힌다. 그러니 ‘모르는 게 약(藥)’이라는 속담은 마음 상할 일을 괜히 알릴 필요가 없을 때나 할 말이다. 어설픈 앎에 만족할 때 ‘아는 게 병(病)’이 되지만, 끊임없이 묻고, 때로 당연한 것까지 의심하고, 다른 견해를 경청할 때 ‘아는 게 힘’이 된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의 대답이 아니라 그의 질문을 보라’(볼테르, 1694~1778)고 했다. 이에 덧붙여 ‘진리를 탐구하는 이를 귀히 여기고, 이미 그것을 찾았다는 이를 경계하라’고도 했다. 이번 학기 성적평가 요소에 ‘질의’를 포함한 것이 필연 ‘신의 한 수’가 되리라.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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