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달 향해 '부딪히고, 부수고, 달린다'..역대 첫 올림픽 맞는 男 럭비 대표팀

조효석 2021. 3. 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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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이 2019년 11월 24일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에서 올림픽 지역예선 결승 상대 홍콩 대표 선수들을 상대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대한럭비협회 제공

동료 김연수에게서 공을 넘겨받았을 때 그는 이미 전속력으로 경기장 오른쪽 측면을 질주하고 있었다. 정규시간 종료를 채 20초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 마지막 동점 기회였다. 달려들던 중국 선수들이 하나씩 옆으로, 뒤로 나가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탱크처럼 목표지점을 향해 돌진했다. 미끄러지듯 공을 결승지점에 꽂아놓은 뒤, 그는 감격에 젖어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경기가 열린 인천 남동아시아드 럭비경기장 관중석에는 울음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외침이 가득했다.

럭비 남자 대표팀 장성민(29)은 아직도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본다. 그는 “럭비 인생에서 많은 트라이(득점)를 찍어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때”라면서 “유튜브 동영상에 나온 조회 수 중에 반 정도는 제가 본 횟수일 것”이라고 쑥스럽게 웃었다. 중국과 도쿄올림픽 지역예선 준결승을 치른 그때가 2019년 11월 24일, 벌써 1년하고도 4개월이 더 지난 이야기다. 국민일보는 그를 포함한 럭비 대표팀 선수들과 지난 4일까지 인터뷰를 나눴다.

올림픽 진출, 그 후 1년 4개월

대표팀 주장 박완용(38)은 그 사이 국내 럭비 선수 중 최고 맏형이 됐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많던 분들이 지난해 다 은퇴를 했다”고 껄껄 웃었다. 그 역시 같은 날 열린 홍콩과의 결승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일본에 가 있는 장용흥이 이 경기 마지막 트라이를 찍어내며 한국 럭비는 역사상 첫 올림픽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올림픽 진출이 결정된 뒤 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윙어 정연식(27)은 2년간 지낸 일본 프로리그에서 지난해 5월 귀국했다. 연봉도, 운동하는 환경도 일본이 월등했지만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각오였다. 프로리그에서 일반적인 15인제 경기를 연습하는 대신 대표팀에서 올림픽용 세븐스(7인제) 훈련을 하기 위해 한국을 오가는 걸 소속팀 감독이 마뜩잖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림픽이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럭비 남자 대표팀 선수들이 2019년 11월 24일 도쿄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 결승을 이겨 올림픽 진출권을 따낸 뒤 경기가 열린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환호하고 있다. 대한럭비협회 제공

이들의 올림픽 진출은 그 자체로 극적이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부터 럭비가 올림픽 종목에 포함됐지만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한 장은 아시아에서는 독보적 수준인 일본의 몫이었다. 도쿄올림픽 개최로 일본이 자동출전국이 되면서 올림픽행 티켓 한 장이 남았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이 한 장을 준결승과 결승에서 연달아 연장 역전승을 거두며 따냈다. 영화 시나리오라 해도 너무 작위적이라 욕할만한 이야기였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이렇게 긴 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예선 4개월 뒤인 지난해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국제대회를 다녀오니 한국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대회 연기 뒤에도 처음에는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조직력을 가다듬으면 된다고, 세계와의 격차를 미리 좁혀놓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인 건 지난 1월부터 지난달까지 진천선수촌에서 진행한 합숙 훈련이 전부다.

부딪히고, 부수고, 달린다

대한럭비협회 제공

축구와 미식축구의 원류인 럭비는 역사가 오랜 스포츠다. 단순히 말해 ‘몸으로 공을 안고 돌진하는’ 경기다. 미식축구처럼 공격기회가 번갈아 주어지지도 않고, 드물게 발로 차는 것을 빼면 축구처럼 전진 패스가 허용되지도 않는다. 오직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아 공격기회를 얻은 뒤 옆과 뒤로 공간을 노려 공을 뿌리고, 몸동작으로 상대를 제쳐 골라인까지 돌파한 끝에 결승점에 공을 찍는 ‘트라이’에 성공해야 득점이 인정된다. 직관적인 덕에 보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종목이다.

럭비는 주로 구 영연방 국가에서 축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이웃 일본이 독보적이다. 일본 프로리그 1부 팀만 16개에 이르고 경기마다 수만 명 관중이 찾아온다. 세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이른바 ‘빅리그’다. 자국 인기를 반영하듯 리우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은 4강에 드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과의 현실적인 격차를 고려할 때 한국 대표팀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언제 밟을지 현실적으로 기약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예선에서 결정적 도움을 준 남아공 출신 지도자 찰리 로우 코치가 이달 말 입국하지만 자가격리 기간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완전체’가 되는 건 다음달이 되어서다. 그간 헬스장까지 출입이 제한되면서 이들이 몸을 가다듬을 수 있는 건 소속팀에서가 유일했다. 지난해 열린 국내 대회는 11월 코리아 럭비챔피언십 단 하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사이 큰 부상을 당한 선수가 없다는 점 정도다.

박완용은 “일반적으로 선수들이 하는 15인제 대회가 전·후반 각 40분에 선수도 2배 이상 많은 데 비해 올림픽에서 치를 세븐스 경기는 전·후반 각각 7분에 경기장 규격은 그대로”라면서 “경기가 훨씬 빠르고 격렬하게 전개돼 15인제와 별도로 다른 훈련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경기를 치르면 며칠 휴식을 하는 15인제와 달리 7인제는 하루에도 경기를 한꺼번에 몇 개를 소화해야 해 체력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그들이 달리는 이유

대한럭비협회 제공

맏형이자 주장 박완용의 어깨에 이번 대회는 더 큰 무게다. 당초 그는 아내와 올림픽 뒤 자녀를 가질 생각이었지만 대회가 미뤄지며 계획을 늦췄다. 집에 머무를 날이 더 줄면서 아내가 서운할 일도 늘었다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는 말했다. 아내뿐 아니라 올림픽 진출권을 따내기 두 달 전 눈을 감은 아버지를 위해서도, 맘 졸이며 바라볼 어머니를 위해서도 이번 올림픽은 그의 럭비 인생에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한다. 그는 “제게 이번 대회는 인생에 한 번 올 기회”라고 말했다.

정연식은 올림픽을 기다리면서 상대할 대표팀들의 경기를 수없이 동영상으로 지켜봤다. 영상을 하도 본 탓에 꿈에도 종종 나올 정도다. 올림픽을 위해 일본 프로리그에서의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귀국했을 만큼 그에게는 간절함이 있다. 정연식은 “일본에서 겪어봤지만 외국인 선수들 말고는 일본 선수들보다 우리 선수들 기량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다”면서 승산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팀은 이미 리우올림픽 4강에 든 일본 대표팀 멤버를 아시안 게임에서 제압한 경험도 있다.

장성민에게 올림픽에서의 목표는 첫 승리 너머를 향해 있다. 장성민은 포워드 포지션에서도 신체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강하다고 꼽히는 선수다. 그는 “언론에는 우리가 1승을 향해 간다고들 많이 얘기하지만 사실 저는 무조건 메달권 진입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여태 럭비를 하면서 세웠던 목표를 하나씩 이뤄왔다. 한동안 새로운 게 없다고 느꼈다”면서 “신체적으로도 최전성기일 때에 스스로의 한계를 끌어내고 싶다. 메달권에 설사 못가더라도 후회 없이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소속팀에서 늦게까지 홀로 훈련 중이었다.

올림픽 진출이라는 성과에도 한국 럭비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당장 대한럭비협회 홈페이지에도 학교 럭비부 폐지를 막아달라는 요청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기존의 불확실한 국내 진로에 코로나19로 인한 선수 선발의 어려움, 사람들의 무관심 등 여러 악재가 겹쳐있다. 현재도 실업과 대학 선수를 모두 합해 겨우 100명 수준을 오가는지라 위기의 무게는 무겁다.

선수들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올림픽 무대에 전력을 다하는 건 이런 위기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완용은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할 수 있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면서 “이번이 한국 럭비에는 도약의 기회”라고 말했다. 장성민도 “이번 올림픽은 한국 럭비의 새 출발점”이라면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지원도 전폭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만 생각하지 않도록, 정말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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