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윤석열의 시간

2021. 3. 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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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우 성균관대 교수 사회학과


지난 4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직을 내려놓았다. 일진광풍을 이겨낸 검(劍)과 함께 남겨진 건 대국민 전상서(前上書)였다. ‘국민 여러분 얼마나 힘드십니까. 검찰 관련 소문에 얼마나 피로하십니까. 하지만 법치가 말살되고 민주주의가 붕괴 직전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저도 어디서건 돕겠습니다.’ 적장의 무리가 들이닥치자 이내 전상서는 찢기고 짓밟혔다. ‘해괴망측해라’ ‘과대망상이다’ ‘은인 뒤에 칼 꽂은 뻔뻔한 자다’. 홀연히 사라진 장수는 칩거에 들어갔다. 자연인으로 맞닥뜨린 책무의 깊이를 가늠해야 할 고독한 시간.

조국이란 장수에게 기소장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수들은 휘두른 정의의 검을 불의의 검이자 내란의 책동이라 외쳐댔다. 추미애 장수의 칼끝이 윤석열을 향하자 보위 무사들의 수족이 잘리고, 수사권이 무장해제됐다. 직무 배제와 징계 청구의 북이 맹렬히 울리자 벼랑 끝에 발을 디뎠다. 행정법원이 구원의 손을 내밀 시간. 추미애 장수의 칼은 제압됐고 호령이 울렸다. 중원에도 법과 원칙이 있다고. 징계 절차 제대로 밟으라고.

현실에서의 이후 전개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법무부와 검찰 간 소통을 주문했던 대통령의 교통정리는 무시됐고, 중재자로 나섰던 신현수 청와대 민정수석도 패싱됐다. 정권 보위에 온몸을 던진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은 유임됐고, 윤석열 ‘식물인간’ 작전은 중단 없이 지속됐다. 기사회생한 윤 총장이 월성원전 수사의 고삐를 죄자 여권의 움직임은 긴박해졌다. 이내 꺼낸 회심의 카드, 바로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이다. 여당 김용민 황운하 의원이 주거니 받거니 ‘공소청법안’과 ‘중수청법안’을 내놨다. 검경수사권 조정으론 도무지 성에 차지 않으니 6대 중대범죄 수사권도 반납하란 거다. 검찰청 간판은 이제 그만 내리란 주문이다.

평생 경찰에 몸담았던 황 의원은 중대 수사도 경찰이 맡게 하잔 말이 머쓱했던지 돌연 중수청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속전속결 검찰 무력화 작전 실행에 살기마저 느껴진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틀어쥔 건 한국 검찰이 유일하다며 가짜뉴스를 퍼트린다. 프랑스 독일 등 대륙법 전통에서 검사가 수사를 감독하고 지휘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수사 주체 경찰의 권력 남용을 막는 것이 선진 사법국가 최대의 목표라는 걸 정녕 모르는 건지. 수사 경험과 법정 경험이 유리되는 순간, 사법체계의 책임성이 흔들린다는 걸 정말 모르는지 묻고 싶다. 결국 힘없는 국민이 손해 보는 게 명백하지 않나.

현 여권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공격을 ‘적폐’로 규정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브레이크 없는 막가파식 정치다. 조국 일가, 월성원전,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수사 등 살아 있는 권력을 통제하려는 검찰의 당연한 책무는 적폐로 몰렸다. 확고한 반부패 역량과 경제범죄 엄단은 하등 고려 대상이 아니다. 국민 인권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 공무원 투기 조사에서 검찰과 감사원을 배제할 리 없다. 어찌 LH와 ‘내연 관계’인 국토교통부에 조사를 맡길 수 있나. 어떻게 이용구 폭행을 ‘안 본 거로 하는’ 경찰에 칼을 쥐어줄 수 있나. 고위 공무원들의 지능적 반칙과 부패를 과연 총리실이 잡아낼 수 있을까.

자연인 윤석열의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대권 주자로 몸 푸는 시간이란 해석보다 더 그럴싸한 건 없을까.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는 30년 가까운 시간을 검사로 보냈다. 유색인 수감자 숫자가 폭증하고 검사들의 정치적 열망과 기소권 남용이 원인이라는 비판이 일자 검찰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스스로를 진취적 개혁주의자로 탈바꿈했다. 중범죄자에겐 철저한 사법의 철퇴를 내리고, 경범죄자에겐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검찰에 주문했다.

윤석열의 시간도 해리스의 시간과 환골탈태를 빼닮아야 한다. 검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검찰 개혁의 새로운 청사진을 상상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국민은 검찰이 법치와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보다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침해한 역사에 더 익숙하다. 검찰을 적폐로 모는 여당에 반대하지만, 검찰 개혁을 막아서는 것처럼 비치는 야당도 경계한다. 제3의 검찰 개혁을 꿈꾼다. 이 열망에 검찰주의자 윤석열이 낄 틈은 없다. 자기확신 못지않게 자기부정이 필요한 이유다. 윤석열표 검찰 개혁의 그림이 강연과 저술에 포함되길 기대해 본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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