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명자 차 한 잔을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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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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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명자 잎과 줄기 |
ⓒ 용인시민신문 |
이가 시리는 냉장고의 차가운 물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에 여름에도 물처럼 마실 차를 끓여 놓아도 냉장고에 쉬이 들여놓지 않고 상온에 놓는다. 그러다 보니 어제 끓인 차임에도 상해서 못 마시게 돼 아깝게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유독 결명자는 다른 차에 비해 쉽게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어 여름에 주로 끓여먹곤 했다. 아직 겨울임에도 결명자차가 생각나는 건 머지않아 봄과 함께 찾아올 귀여운 설렘 때문이다.
아는 지인이 남해안 작은 섬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고기도 잡으며 살고 있다. 세상에 달관한 듯이 살고 있는 그에게 놀러간 적이 있다. 딱 이맘때 봄이 오기 전 겨울이었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섬 한쪽에서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 길쭉길쭉 꼬투리를 달고 있는 것을 무심하게 낫으로 베어 큰 포대에 담아주고는 알아서 먹으란다. 눈에 좋은 결명자라고.
청정 남해안 섬에서 자라는 것이라 그게 무엇이든 좋아 보여 덥석 받아 안고 집으로 가져왔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됐다. 기다란 콩 꼬투리이니 그냥 무식하게 하나씩 잡고 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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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땅콩 새싹처럼 생긴 결명자 싹. |
ⓒ 용인시민신문 |
처음엔 동그란 잎이 마치 땅콩 새싹처럼 생겨 몇 년 전 농사 지었던 땅콩이 떨어져 싹이 텄나 싶었다. 그런데 뭔가 좀 달랐다.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봐도 땅콩이 아니었다. 아뿔싸, 찌꺼기에 묻혀 버려졌던 결명자 작은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결명자를 차로만 마셔봤지 자라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기왕 이렇게 된 것 잘 키워서 결명자차를 더 만들기로 욕심을 냈다.
그런데 자라는 모습이 상상 이상이었다. 여름이 되자 노란 꽃도 피었고, 노란 꽃에선 기다란 씨방이 자라 꼬투리가 됐다. 결명자의 꼬투리는 아주 날씬하고 길게 생겼다. 쫙 뻗은 손 한뼘 정도 길이였다. 그러는 사이 키가 커 집 식구들보다 크게 자랐다. 작은 텃밭에서 키우기엔 너무 큰 결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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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콩처럼 생긴 결명자 |
ⓒ 용인시민신문 |
햇빛이 적게 드는 땅으로 옮겨 심었더니 이번엔 첫 해만큼 튼실하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다 수확 시기를 놓쳤고, 결명자는 바짝 말라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저 꼬투리가 터져 씨앗들이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날이 갑자기 풀린 며칠 전 벼르고 별러 꼬투리를 땄다. 그리곤 또 결명자 씨앗을 마주하고 있다. 햇빛이 적어 부실했던 열매는 씨앗도 작았다. 그래도 감사하며 차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 올 봄에도 적당히 싹이 터준다면 이번에는 햇빛 좋은 곳으로 안내하리라.
언젠가 콩을 수확하며 느낀 점을 SNS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봄에 열 개로 심은 콩이 가을이 되니 이렇게 많아져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이 나중에 큰 일로 커질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매사에 온 마음을 다해 살아야겠다." 그때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 작은 단서가 있을 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작은 일이 큰 일로 몰아쳐 왔다.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며 후회한 일을 콩을 보며 떠올렸다.
하나의 씨앗이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그것이 좋은 일이었을 때는 운수대통이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작은 일이 나중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불행으로 커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엔 생각보다 그런 일이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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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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