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사과한 적 없는 아버지.. 이 영화의 강력함
[홍기표 기자]
▲ 영화 <세자매> 포스터 |
ⓒ 리틀빅픽처스 |
폭력은 진보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학 때 교양으로 들었던 경제학 수업에서 담당 교수의 첫 질문이자 숙제가 '인간의 역사는 진보했는가'였다. 그때 당시 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교수는 백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살인과 폭력이 줄어든 수치를 근거로 인간 사회는 살기 좋은 곳으로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각자 추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진보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이 사회가 전보다 조금은 더 온순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만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폭력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교폭력' 이슈가 아닐까.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마른 장작에 뗀 불처럼 순식간에 퍼져 가해자에게 책임을 추궁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비명이 소셜 미디어와 같은 거대한 광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가해자들은 사과를 하며 활동 중단 등을 선언했지만 막을 내린 그들의 영광 뒤에 남은 씁쓸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다.
때로는 이것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이 "너무한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과거는 잊고 내일을 살아가라고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는 더 이상 세상이 진일보하는 데 필요한 슬로건이 아니며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은 후 사과와 용서로 다져진 현재가 진정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미덕이라는 것을.
폭력과 상처 그리고 사과와 용서
영화 <세자매>에서도 폭력과 상처 그리고 사과와 용서에 대해서 묻고 있다. "아버지 사과하세요! 목사님 말고 우리에게!"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두드리는 미연(문소리 분)의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 아버지 생신 축하 기념으로 근사한 식당에 한 가족이 모여 기도를 하던 중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그들 자식에게 상처로 남았지만 자식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이 없었다. 상처는 곪아서 치유가 불가능해졌고 어느새 삶의 일부분으로 체화되어 '만약 그 폭력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도 지워져 버렸다. 막내 아들 진섭(김성민 분)은 욕설과 함께 아버지에게 오줌을 싸고, 둘째 미연은 사과하라고 소리치고, 첫째 희숙(김선영 분)은 이제 그만하자고 입 안 한가득 음식을 집어삼키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그러자 미연의 딸, 보미(김가희 분)가 한 마디 내뱉는다.
"왜 어른들이 사과를 못해! XX"
이후 아버지가 창에 머리를 찍자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배경인 바다를 향한다. 세자매는 멍게와 소주를 먹기 위해 추억을 더듬어 바닷가에 갔지만, 가게는 문을 닫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셋은 멍하니 바다를 보며 앉았다. 그러다 갑자기 첫째가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것이다. 화면에는 세자매의 얼굴이 한 데 모이고, 김동률이 만들고 이소라가 부른 음악이 흐르면서 그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 영화 <세자매> 스틸컷 |
ⓒ 리틀빅픽처스 |
세자매의 캐릭터는 아주 강력했다. 영화는 세자매들의 각각의 장면 비중을 균등하게 분할했지만, 전개와 흐름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확연하게 구분되는 자매들의 이야기가 아버지 생신 축하자리에 한 데 뭉쳐져 폭발하는 서사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감독 이승원은 대사에 비중을 많이 두는 편이라고 밝혔는데, 아마도 그들의 각 에피소드의 후벼 파는 대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욱 값진 것은 장윤주의 연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 문소리와 김선영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의 캐릭터는 보는 내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그런 그녀의 연기가 너무나 태연하여 깜짝 놀랬다. 품행제로에서의 류승범이 오버랩된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세자매는 훌륭한 영화다. 세자매가 겪은 폭력은 지워지지 않고 상처를 남겼다. 상처는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크나큰 아픔으로 삶의 궤적을 함께한다. 이후 세자매는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요구와 저항이 더 아름다운 여인으로 늙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