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는 단단한 평화 속에 산다ㅣ사적대화

김초혜 2021. 3. 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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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예리가 차곡차곡 구축한 단단한 평화.
자켓, 셔츠, 타이 모두 Dior. 진주 포인트 언발 이어링은 Hyeres Lor.

처음 배우 한예리를 알게 된 건 그의 첫 주연 중편 영화 〈기린과 아프리카〉에서였다. 교복을 입고 싱그럽게 웃으며 아름답게 춤을 추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완벽하게 매료시켰다.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빈틈없이 꽉 찬 목소리로 자유롭게 자신만의 필모그라피를 그리는 배우 한예리. 어쩌면 그의 이름과 작품을 전 세계가 주목하게 된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Q : 전 세계 영화제에서 〈미나리〉를 주목하지 않은 곳이 없어요. 예상했나요

A :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많은 분이 공감하는 영화가 될 거라 상상하지 못했어요. 〈미나리〉는 한 가족이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정착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예요. 인생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을 깊이 있게 다룬 영화라 가능했을 거예요. 영화가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게 나왔어요.

Q :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해요

A : 영문 대본이었어요. 번역을 부탁하고, 구글 번역기로도 돌려봤죠. 글로 읽었을 때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든 감정이 디테일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번역했기 때문에 생략된 부분이 많아서 더 그랬을 거예요. 그렇지만 읽는 내내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 않을까?’ 호기심이 생겼어요. 나중에 정이삭 감독님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죠. 결정적으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실제로도 굉장히 좋은 분이셨고 함께 작업한다면 즐거울 것 같았어요.

원피스는 Moon J. 골드 드롭이어링은 Tatiana Jewelry. 웨스턴부츠 Rachel Cox.

Q : 촬영 환경이 낯설지는 않았나요

A : 촬영장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불쑥 ‘내가 어디로 가고 있나’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미나리〉에서 제가 연기한 모니카는 아이 둘이 있는 엄마인데요. 연기하면서 따뜻한 느낌도 들었고, 외롭고 고독하기도 했어요. 모니카가 베이스로 가진 감정 중 많은 부분 이 사랑이거든요. 사랑으로 감내하고 버텨내면서 가족이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가족 안에서 엄마 역할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Q : 필모그래피를 보니 ‘한예리는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A : 이 일을 잘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작업을 해야 지치지 않는다고 믿고요. 너무 힘들고 싫은 걸 타협하면서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공연이 에너지를 꽉 채워서 하는 느낌이라면, 연기는 비워가면서 하는 작업이라 서로 좋은 시너지가 돼요. 무용 공연을 할 때는 가장 불편한 자세가 편안해 보일 때까지 연습하거든요. 연기는 반대로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시작하고요. 두 가지를 오가면서 기술이나 기량이 강해지는 부분이 있어요.

Q :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무용을 전공했죠

A : 엄마 친구인가 이모 친구분이 동네에 무용 학원을 열었어요. 당시엔 어린이집도 없어서 언니랑 놀기 삼아 다녔던 데가 한국무용 학원이었어요. 무용을 본격적으로 해보겠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고 중고등학교 때도 자연스럽게 무용을 하게 됐죠. 대학에 들어가서도 춤추는 게 좋았지만,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어요. 비슷한 커리큘럼이 반복되는 게 힘들었던 시기를 마주했고요. 한예종에서 영화 전공 친구들 알게 되면서 연기할 기회가 생겼어요

.자켓, 셔츠, 타이, 스커트 모두 Dior.

Q : 본격적으로 연기한 첫 중편 영화 〈기린과 아프리카〉를 봤어요. 굉장히 아름다운 연기라고 생각해요

A : 〈기린과 아프리카〉를 연출한 김민숙 감독의 전작 〈사과〉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그 영화에 살풀이하는 무용수 역할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랑 제가 가서 춤을 췄어요. 그때 감독과 친해졌고, 졸업 작품 오디션을 보고 〈기린과 아프리카〉에 참여하게 됐어요.

Q :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 엄청 자유로워 보이더라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A : 첫 작품을 찍을 때만 해도 촬영 시스템을 잘 몰랐어요. 한 컷 찍을 때마다 감독님이 와서 다음 과정을 설명해줬어요. ‘디렉션에 맞춰 집중하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연기했던 거 같아요. 그때만 해도 연기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생각하진 못했어서 오히려 진짜 재미있게 즐기면서 한 일이죠. 뭘 몰라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Q : 무용에서 연기까지 커리어를 확장하겠다 결정한 계기가 있나요

A : 〈기린과 아프리카〉를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여러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모두가 연기하려면 무용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했죠. 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요. 둘 다 할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무용을 서른까지 하고, 접어야지’ 생각했을 정도로요. 그 찰나에 지금의 소속사 대표님을 만났어요. 배우가 무언가를 하나 더 잘할 수 있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큰 장점이라 믿어주셨죠.

원피스는 Moon J. 골드 드롭이어링은 Tatiana Jewelry.

Q :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모두가 자기 식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죠

A : 욕망을 줄이면 좀 괜찮은 것 같아요. 당장 가질 수 없는데 혼자서 달달 볶아봤자 너무 힘들고 피곤하잖아요. 그런 상태에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실수할 수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무용을 해오면서 욕망이 일정 부분 사라지기도 했어요. 경쟁에 노출된 채로 오랜 시간 지냈거든요. 그게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걸 일찍 깨닫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부러우면 ‘너무 부럽다’고 이야기해요. 축하할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요. 진심이 아니라면 일부러 말하지 않는 편이에요. ‘예리야, 진심으로 축하해 줄 거 아니면 하지 마’라고 혼자 생각하죠.

Q :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가짜 감정을 자주 얘기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A : 시간이 지날수록 갖고 싶다고 해서 다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엄청 애쓰면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망가지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힘들어지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갈 수 있는 길과 제가 잘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잘하는 걸 더 잘할 생각을 해야지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더라고요. 스스로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

Q : 언젠가 연기해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A : 여러 영화를 볼 때마다 ‘저 연기를 하면 되게 좋겠다’ 이런 생각은 하는데 그게 그렇게 오래 남지 않아요. 어차피 제 것이 아니니까. 그냥 좋겠다 하고 말아요. 다음에 어떤 장르를 연기하고 싶은지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저는 그런 것도 없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플레이어 기질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오히려 스크립트를 제안받았을 때 ‘ 어, 이거 진짜 마음에 드는데’ 싶은 거죠. 그제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자켓, 셔츠, 타이 모두 Dior.

Q : 반대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배역은

A :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녹두꽃〉의 자인이에요.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캐릭터는 〈최악의 하루〉의 은 희고요. 이상한 구석도 있지만 계속 방황하는 은희가 너무 귀엽잖아요. 그리고 가장 쓸쓸했던 사람은 〈춘몽〉의 예리. 개인적으로 〈춘몽〉의 예리는 연기하면서 말투가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Q : 다양한 영화들이 세상 밖으로 자꾸 나와야 한다고 얘기한 적 있어요

A : 편의점에만 가도 굉장히 다양한 물건들이 있잖아요. 다양성 영화들이 나와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야 선택의 폭이 넓다고 생각하거든요. 여러 영화가 있는데 특정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 건 관객의 몫이죠. 하지만 선택조차 할 수 없도록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엄청나게 큰 산업인 건 맞아요. 그런데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이런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생각과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서 예술인 거죠.

Q : 배우 한예리에게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요

A : 저는 계속해서 꿈꾸는 중이에요. 〈미나리〉에서 윤여정 선생님과 연기하면서 든 생각인데요. 선생님은 76세이신데 굉장히 왕성하게 활동하시잖아요. 지금 내 커리어가 나를 증명하고, 전부를 보여주며,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는 거죠. 모든 게 다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역시 과정 안에 계시고요. 하나하나 충실하게 선택하는 수밖에 없어요.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일은 흔하지 않거든요. 그런 기회가 한 번이라도 오면 감사한 일이지만, 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천천히 끝까지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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