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참여연대와 민변의 길

2021. 3. 5.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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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논설위원


2000년 16대 총선 때 정치인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존재는 선거관리위원회도, 검찰과 경찰도, 심지어 유권자도 아니었다. 그들을 가장 떨게 했던 건 참여연대였다. 참여연대는 다른 시민단체들을 규합해 부정부패 전력이 있거나 정치를 엉망으로 한 총선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낙선운동’을 펼쳤다. 당시 대부분 전현직 의원들인 86명의 낙선운동 대상자들을 발표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놨다. 낙선운동이나 명단 발표 자체가 불법이니, 위헌이니 하는 논란이 많았지만 참여연대는 처벌을 감수하고 명단 발표를 강행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86명 중 59명이 낙선했다. 낙선운동은 17대 총선 때도 이어졌다. 그걸 주도한 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참여연대는 이밖에도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88년 재벌 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 2001년 이동통신 요금 인하운동, 2010년 반값 등록금운동, 2016년 가습기 피해 관련 징벌적 배상법안 청원운동 등을 펼쳤다. 권력과 재벌, 힘 있는 자들에게 참여연대는 정말 성가신 존재였지만, 참여연대가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어떤가. 군사정권 이래 숱한 시국사건의 변론을 도맡는 등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법으로 맞서온 게 민변이었다. 흡연 피해자 집단소송과 같은 공익소송이나 힘 없는 자들을 위한 무료 변론도 늘 민변의 몫이었다. 억울한 일을 파헤치는 각종 진상규명운동이나 법률적 대응이 필요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같은 인권운동 역시 민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랬던 참여연대와 민변이 정말 오랜만에 이름값을 해냈다. 모처럼 참여연대와 민변다웠다. 두 단체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3기 신도시 예정지에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제보받아 자체 조사 후 의혹이 사실이라고 판단해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어 전격 폭로했다. 투기 파장은 단순히 LH만의 모럴해저드를 넘어 문재인정부의 씻을 수 없는 치부로 남을 개연성이 높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참여연대와 민변에 아직도 제보가 가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었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대표적 시민단체지만 현 정부 들어선 그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 비정부기구(NGO)를 표방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두 단체를 문재인정부의 자매기구쯤으로 여기고 있다. 김경율 참여연대 전 집행위원장도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시민단체들이 상당히 권력 친화적 태도를 갖고 있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한 사실 하나하나에 무비판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건 진보 진영의 몰락”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던가. 김 전 위원장은 결국 참여연대를 탈퇴했다. 참여연대는 실제 조국 사태 이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조국 의혹의 대부분은 공직자가 직무상의 권한을 남용한 권력형 비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권력형 비리가 아닐진 몰라도 참여연대가 구태여 정의를 무너뜨린 반칙들을 그런 식으로 옹호해야 했을까.

민변도 마찬가지다. 민변 출신들이 청와대와 여당에 대거 들어가면서 문재인정부와 민변이 공동정부를 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역풍으로 당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뒀을 때도 민변 출신들이 대거 여당에 들어가고, 정부직에도 임명됐던 적이 있다. 적어도 당시에는 ‘우리가 여권과 한편이 돼도 되느냐’며 독립적인 시민단체로서의 흔들리는 위상에 대한 민변 내부의 자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정청에 들어가는 게 아무 거리낌없는 일이 돼 있다. 거리낌은커녕 민변이 그런 길로 가는 코스인 양 착각될 정도다.

어디 두 곳뿐인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을 비롯해 타 단체 출신들도 정권과 한 배를 타고 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그래서 ‘제5부’로 불리는 시민단체가 지금은 정권에 협력하고 그 떡고물을 챙기는 존재처럼 비칠 때가 많다. 그렇기에 이번 참여연대·민변의 투기 의혹 폭로가 더 반갑게 느껴졌다. 시민단체들이 제 역할을 되찾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정의를 세우고, 부패를 척결하고, 자신들의 출세가 아닌 낮은 자들을 보듬는 일에 앞장서는 시민단체 본연의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이제는 권력과의 로맨스를 끝내야 한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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