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권이었던 윤여정의 대답.. '미나리' 본 뒤 떠오른 질문

이현파 2021. 3. 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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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전세계 주목받은, 보편적 가족 영화 <미나리>

[이현파 기자]

 영화 < 미나리 > 중
ⓒ 판씨네마㈜
 
"우리는 가족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 >를 관람한 후 머리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세간에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의 성장기에 근거해 만들어진 영화다. 정 감독은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주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아칸소 주로 이사했다. 이민자 가족이 겪게 되는 불안정과 혼란이 영화 전체에 배어 있다.

병아리 감별을 업으로 삼았던 제이콥(스티븐 연)은 농사로 성공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아칸소로 향했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실패에 익숙한 편이다. 그들은 '우리가 서로를 구해주자'며 미국에 왔지만, 가족은 현실의 산물이었다. 사랑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10년 동안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를 목도해야만 했다.

그들이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이동식 주택, '바퀴달린 집'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토네이도가 닥치면 언제라도 뿌리째 뽑혀 사라질 수 있는 집, 말라버린 물이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온 순자(윤여정)에게 모니카는 말한다. "엄마한테 우리 사는 꼴 다 보여줬네." 이때 순자가 내뱉는 대답이 압권이다.

"바퀴달린 집이라서? 재밌다 얘!"

영화 초반, 제이콥은 탄생과 동시에 폐기되는 수평아리에 자신을 이입한다. 그는 움츠러들어 있다. 자본주의의 그림자는 인간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며, 삶을 건조하게 만든다. 계속되는 실패는 제이콥을 독단적으로 만들고, 모니카는 가족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간다. 한국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도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많은 미국 거주 한인들에게 교회는 중요한 준거 집단으로 작용한다. <미나리>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가 기독교를 다루는 방식은 전형성을 빗겨 간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부부가 만나는 한인들은 한인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제이콥의 농사를 성심성의껏 돕는 폴(윌 패튼)은 매주 일요일, 십자가를 직접 지고, 알 수 없는 방언을 읊는다.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괴짜 광신도 취급을 받지만, 주인공 부부가 가족을 이끌어 나가는 과정 역시 폴의 지난한 고행을 닮아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순자씨
 
 영화 < 미나리 > 중
ⓒ 판씨네마㈜
정이삭 감독은 어린 시절의 그림자를 피해가지 않았다. <미나리>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그랬듯, 감독이 자신의 어린 날에 보내는 진실된 헌사다. <미나리>는 영화의 배경인 아칸소 시골 마을처럼 잔잔하다. 소박하게 흐르는 시냇물 같은 영화지만 호수 같은 깊이를 갖췄다. 목가적인 풍경을 담아낸 영상미, 신예 영화음악가 에밀 모세리(Emile Mosseri)가 만든 음악 역시 극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윤여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연기 앙상블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미나리>의 주역들은 함께 먹고 자면서, 문어체로 쓰여진 대본 속의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였다. 가족의 다면성을 표현한 배우들의 앙상블은 이 영화의 특장점이 되었다. 특히 한예리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윤여정은 정이삭 감독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할머니, 그리고 그 기억 위에 독창성을 더해 '순자'를 완성했다.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로 손꼽히고 있는 그의 눈빛은 한국어를 모르는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순자는 이민 가정의 자녀들인 데이빗(앨런 킴)과 애니(케이트 조)에게 이방인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손주들에게 쿠키를 만들어주는 대신, 화투를 가르친다. 밤을 직접 입에 넣어 이로 깬 다음, 먹으라며 넘겨 준다. 아이들은 이런 순자를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순자는 이 가족에게 '잊고 살았던' 사랑을 선사한다. 그 사랑은 건조해진 가족 공동체에 응집력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순자와 데이빗의 관계성은 이 영화에서 큰 진폭으로 감정을 움직인다.

"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뽑아 먹을 수 있어.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

이 영화는 익숙한 것을 가지고 어렵지 않은 비유법을 쓰는, 제법 친절한 작품이다(나는 미나리전을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미나리는 국에 넣어 먹어도, 찌개에 넣어 먹어도 좋다. 영화 속에서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좋은 터에 심는다. 미나리는 어디에 심어도 잘 자라나는 생명력을 가졌다. <미나리>에 등장하는 '가족'들 역시 그렇다. 대단한 구원을 이루기는 어려울지라도, 가족은 쉬이 해체되지 않고 황량한 터에서도 삶을 이어 갈 것이다. < 미나리 >는 표면적으로는 이민자 가정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리고 있으나, 각자의 가족을 돌아보게 만드는 보편적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날 어머니에게 '가족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동 세대의 많은 어른처럼, 어머니는 가족을 '운명공동체'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생각하는 가족은, 미나리와 같은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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