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북한산] 숙종의 우울, 가상의 치유

이지형 헬스조선 취재본부장 2021. 3. 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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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 내려 서문, 행궁, 동장대를 거쳐 동문에 이르는 길이 왕의 길인 줄 몰랐다.

1712년 봄날, 왕궁을 나온 숙종은 녹번 고개 넘어 북한산성의 서문에 이르렀으니 내가 구파발에서 버스 타고 온 그 길까지 '숙종의 길'이다.

그래서 북한산성은 숙종의 고뇌와 근심을 해결해주었나, 해소해주었나.

그래서 다시 한 번, 북한산성은 평생에 걸친 그의 우울을 해결해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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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성곽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한다. 성곽이 끊어진 자리를 험봉(險峯)과 예봉(銳峯)이 번갈아 메우며 치유, 위로의 공간을 만들어낸다./사진=헬스조선DB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 내려 서문, 행궁, 동장대를 거쳐 동문에 이르는 길이 왕의 길인 줄 몰랐다. 1712년 봄날, 왕궁을 나온 숙종은 녹번 고개 넘어 북한산성의 서문에 이르렀으니 내가 구파발에서 버스 타고 온 그 길까지 ‘숙종의 길’이다. 미처 몰랐다. 그보다 1년 전인 1711년, 일군의 병사들은 봄 넘겨 쌓기 시작한 산성을 가을 넘기며 마무리한다.

숙종은 완성된 산성을 보고 싶어 겨울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북한산으로 갔다. 하늘이 내려준 험지(險地)라고, 그래서 한 사람이면 만 사람을 막을 수 있겠다고 감탄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만 완성되면 조선의 안위에 위협은 없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숙종은 1712년 봄날의 순례로, 30여 년 전 즉위 후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우울과 두려움을 떨쳤다. 떨칠 만했나.

◇ 평생에 걸친 불안… 북한산성을 쌓아야 했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맘 아픈 일이 없다. 얼마 전 숙종의 길에 대해 전해 듣고도 맘 아팠다. 숙종은 명민하고 예민했던 모양이다. 13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46년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환국’이란 이름으로 집권 세력을 흔들었다. 반목하는 당파들의 운명을 여러 차례 들었다 놨다. 문예(文藝)에도 능해 여느 왕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시(詩)를 남겼다. 정치적으로 명민하고 정서적으로 예민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임진·병자 양란의 끔찍한 사연을 멀지 않은 기억으로 안고 살았다. 나라와 서울과 자신의 안위가 늘 불안했다.

강화와 남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정비했지만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다. 청을 둘러싼 대륙의 정세는 요동쳤고, 동해에선 왜구가, 서해에선 해적이 출몰했다. 황당할 만큼 생소해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렀던 이국(異國)의 배들까지 한강을 치고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평생 불안하고 우울했다. 도성을 정비한 직후,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북한산성을 쌓아올린 건 그 때문이다. 6개월에 걸친, 전례 없이 스피디한 축성이었다. 북한산성의 축성과 이듬해의 순례는 숙종의 우울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었을까.

◇ 고뇌와 근심은 해결되거나 해소된다, 그리고…

문제는 해결되거나 해소된다. 숙종의 문제는 육지 또는 바다로부터 침략이 있고 그 침략을 막아내면 해결된다. 그러나 문제란 건 상황이 바뀌면서 해소될 때가 더 많다. 왕으로 있는 동안 침략이 없으면 문제는 사라진다. 해소된다. 그래서 북한산성은 숙종의 고뇌와 근심을 해결해주었나, 해소해주었나.

문예에 능했던 숙종이다. 북한산성 순례의 길, 곳곳에서 그는 시정(詩情)을 터뜨린다. 장엄한 기운에 마음까지 웅장해져 근심을 날리고는(서문에서), 안개 몽롱한 백운대 정상을 바라본다(행궁에서). 도적의 무리들이 범접할 수 없는 봉우리들에 감탄하고(동장대에서), 길을 옮겨도 여전히 험한 능선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떨친다(동문에서).

그래서 다시 한 번, 북한산성은 평생에 걸친 그의 우울을 해결해주었나.

해소해주었나.

◇ 마음속에 쌓아둔 저마다의 요새, 가상의 위로

천혜의 산세와 인공의 석벽이 어우러진 북한산성을 거닐 때마다 숙종의 오랜 우울을 생각한다. 산성의 의미를 생각한다. 북한산성은 그에게 무엇이었나. 청이나 몽골의 침략을, 북한산성으로 막을 수 있었을까. 황당선의 은밀한 침투를 산성으로 견딜 수 있었을까. 방패로 쌓아졌으나 기능한 적 없으니 쓸모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산성은 좁고, 좌우로는 많은 길이 열려 있다.

북한산성은 차라리 그에게 상상 속의 치유 공간이었다. 수십 년의 공포와 우울을 날려준 마음속의 요새, 가상의 보루. 해결도, 해소도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정신 안에, 도성에서 탕춘대성을 거치며 이어지는 거대한 산성을 쌓아두고 짐짓, 오랜 시름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300년 후…, 주말의 등산객들에게 북한산성은 무얼까. 구파발에서 34번, 704번 버스를 타고 숙종의 길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북한산과 북한산성은 무엇인가. 도심에서 얻은 근심과 시름을 날려주는 거대한 위로, 내밀한 치유의 공간…. 주말엔 다시 북한산성을 돌아볼 생각이다. 서문에서 행궁, 동장대를 거쳐 동문에 이르는 그 오래된 길, 시름에 찬 왕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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